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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성 김작가 May 29. 2021

5. 합체 로봇

생활

어릴 때 봤던 만화 중에, 기억나는 것이 있다.

어떤 내용인지 잘 기억나진 않지만, 여러 로봇이 하나의 로봇으로 합체되는 장면은, 또렷하게 기억난다. 워낙 인기 있던 만화라 문방구에 가면, 장난감으로 팔기도 했다. 만화에서처럼 착착 잘 합체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신기해하며 가지고 놀았다. 하나라도 잊어버리면 완전체로 합체하기 어렵다. 팔 부분의 로봇을 잃어버리면 외팔이로 가지고 놀고, 머리 부분의 로봇을 잃어버리면 머리 없이 가지고 놀았다. 그렇게 하나둘씩 잃어버리고 결국 합체하는 것은 포기한 채 낱개로만 가지고 놀았다.      


만화에서는, 각자 임무를 수행하다가 강력한 적을 만나면, 합체가 되어 큰 로봇이 되었다.

여러 개의 로봇이 합체가 되며 하나가 된다. 각각의 로봇은 서로 대화하면서, 합체된 하나의 로봇을 조정한다. 임무가 완수되면 다시 분리되고, 각자의 임무를 수행한다. 각자 존재하지만, 필요할 때 하나가 되는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가정의 모습도 이와 같다. 

각자 해야 할 역할을 하면서 생활하지만, 하나로 뭉쳐야 할 때가 있다. 어릴 때, 가족의 중요한 사안이 있으면, 어른들이 모여서 상의를 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서로 의견을 내고, 의견이 맞지 않을 때는 조율하기도 하면서, 합의를 이루어낸다. 형제도 많고 별다른 소통의 수단이 없었을 때는, 모여서 상의하는 모습을 종종 봤다. 핵가족 시대인 지금은, 모여서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필요 없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바쁜 생활을 하고 있고,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정이 하나 되기 위해서는,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식탁에 모여 식사를 하거나, 다과를 나누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필요하다.

한자리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통해, 가족은 하나가 될 수 있다. 서로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아픔을 알게 된다. 한 번은, 둘째 아이가 말하다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다. 둘째 딸은, 언제나 천진난만한 모습과 말을 잘 듣는 아이로 포지셔닝되어있다. 그래서 아내는 심부름시킬 일이 있으면 둘째를 제일 먼저 찾았다. 언제나 싫은 내색 없이, 밝은 모습으로 미션을 수행했다. 그 모습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시키는 횟수와 종류가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으면서 서러움이 함께 밀려왔는지, 울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공부하고 있을 때나 무언가를 하고 있을 때, 묻지도 않고 시키는 게 싫었다고 한다.

대답을 하고 방에서 나왔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던 막내나 첫째를 보면 서운함이 밀려왔다고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있던 언니나 동생한테는 시키지 않고, 무언가를 하고 있음에도 불러서 시키는 게 싫었던 거다. 아니 싫다기보다 서운했던 거다. 아내도 흠칫하며 당황했다. 항상 씩씩하게 대답하고 시키는 일을 잘했기 때문에 시킨 거였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에 살짝 충격을 받았다.      


“아니, 그러면 공부하고 있다 뭐 하고 있다 하고 말하지 왜 말하지 않았어?” 

아내는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둘째에게 질문했다. “시키는데 어떻게 안 해요? 그리고 시킬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것도 아는데 어떻게 안 해요.” 둘째의 대답에 아내의 눈가도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천사의 속은, 썩어 문드러졌을 거라는 옛 어르신의 말씀이 떠올랐다. 착하게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는 말이다. 겉으로는 아닌 것처럼 말하지만, 속으로 삼키고 견뎠을 무게가 무겁다는 말도 된다.   

  


함께 모여 대화의 시간을 갖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둘째의 속상함과 서운함은 점점 차오르게 된다. 사람이 마음에 담을 수 있는 한계는 분명히 있다. 그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 평소 수줍어하던 사람도 폭발하게 된다. 둘째도 그랬을 거다. 어느 순간 폭발해서, 앞으로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수도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아내는 과연 “그랬구나”하고 이해했을까? 아니다. 버릇없이 말한다고 한 소리 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해하기보다, 질책하게 된다. 일상에서는 그렇게 된다. 그래서 대화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한집에서 자주 보기 때문에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생각보다 그렇지 않다. 

안다고 착각하는 것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선무당이 사람을 제대로 잡는다. 누구나 그렇게 오해가 쌓이고 멀어진 사람이 한두 명쯤은 있다고 본다. 가족이라고 다르지 않다. 오히려 더 심할 수 있다. ‘가족끼리 뭘’이라면서, 아무 곳이나 갖다 붙인다. 자신이 필요할 때나 아쉬울 때 특히 그렇다. 그럼 가족이기 때문에 이해되기보다, 가족이라 더 얄밉다.     


아픔을 도닥여주고 감싸주어야,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진다.

‘속상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음을 염두하고 살피게 된다. 가족이라고 전혀 거리두기 없이 행동하는 게 아니라, 적절한 거리를 두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거리는, 공간이다. 사람과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데 반드시 있어야 할, 완충작용을 하는 공간이다. 가족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더 필요하다.     

 


자동차 보닛을 열어보면 보면, 빈 곳이 많다. 

깊게 생각하지 않으면, 꽉 채우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 자동차 앞부분이 부딪힐 경우, 꽉 차 있어야 운전자나 동반자가 보호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빈 곳을 일부러 확보한 이유가 안전이다. 공간이 있어야 충격에 대한 완충작용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공간이 있어야 안전하다는 말이다. 가족도 그렇게 공간을 만들어야, 안전한 관계로 단단해지고 하나가 된다. 

    

한집에 살기 때문에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모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친구들이 한참 군대 가던 시절을 떠올리면,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군대에 가지 않는 친구보다 군대에서 휴가 나온 친구를 더 자주 보는 상황 말이다. 어떨 때는, 해외에 나가 있던 친구가 잠시 들어와서 만나게 됐는데, 그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친구를 볼 때도 있다. 군대에서 휴가 나온 친구나, 해외에서 잠시 들어온 친구는 지금 아니면 보기 어렵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시간을 낸다. 하지만 가까이 있는 친구는 언제든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생각만 하다, 오히려 더 보지 못한다.    

  

일주일에 한 번이든 한 달에 한 번이든, 정기적으로 모이는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아이가 어릴 때 이런 규칙(?)을 만들어 놓으면, 아이가 커도 유지하기 수월해진다. 원래 그래야 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하지 않다가 하면 거부감이 생기지만, 어릴 때부터 해오던 거라면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아이들이 어릴 땐, 이런 시간을 자주 가졌는데 아이들이 크고 각자의 일정이 있다 보니, 쉽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일주일에 1번 이상은 꼭 자리를 만든다. 주말 출장이 잦은 관계로, 주로 주일 저녁일 때가 많다.      


때로는 희생이 필요하다. 

우리 집은 TV가 없다. 결혼한 이후, 17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TV가 없으니까, 가족이 거실에 나오면 식탁에 모이게 된다. 가만히 앉아있기도 하고,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책을 보기도 하고, 아이들은 가끔 숙제하거나 무언가를 그리고 만들기도 한다. 각자의 책상이 있지만, 자석이 금속을 끌어당기는 것처럼, 식탁이 아이들을 끌어당긴다. 가끔은 가족 모두가 보드게임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아이들이 크면서는 TV를 사자고 단합(?)해서 주장하지만, 버티고 있다. 요즘은 원하는 프로그램을 인터넷으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자주 소통해야 하고, 그런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의지로 하려 하지 말고, 환경을 만들면 자연스레 그렇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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