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또 다른 출근길
‘문이 열렸습니다.’
공동현관문이 열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어젯밤에 잠깐 비가 내려서인지, 유독 하늘이 파래 보였다. 중간중간 뭉쳐있는 하얀 구름도 유독 하얗게 보였다. 평소처럼 깊게 그리고 천천히, 찬 공기를 들여 마셨다. 공기도 유독 맑게 느껴졌다. 잠시 맑은 날씨를 느끼고 지하철로 걸음을 옮겼다. 회사에 들어서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출입문이 열리고 들어서면, 제일 먼저 박 주임이 나를 쳐다본다.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고 반쯤 자리에서 일어난 어정쩡한 자세로, 두 손을 모으며 나를 쳐다본다. 문에 들어서는 내 눈빛과 표정으로 결과를 예상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장난 좀 쳐줄까?’ 잘 해결됐다고 그냥 표현하기에는 뭔가 좀 아까웠다. 너무 쉽게 말하면 그냥 해결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고도의 심리전과 발 빠른 임기응변으로 우여곡절 끝에 잘 마무리된 것으로 보이고 싶었다. 사실이 그렇기도 하고. 이런 나의 스토리가 부장님 귀에 들어가면 그동안의 설움을 어느 정도는 만회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이거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그림이다. 내가 직접 부장님 방에 들어가서 보고할 수도 있지만, 이런 건 소문을 타고 흘러 들어가야 더 가치가 빛나는 법. 문제를 잘 해결했다고 박 주임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설렜는데, 생각보다 더 큰 그림이 내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징~ 징~’
핸드폰 화면 액정에 ‘내 사랑~’이라는 문구가 떴다. 그녀가 직접 저장한 이름이다.
“어? 아침 일찍부터 웬일이야?”
“웬일은? 어제 바로 퇴근하면 한다고 말이라도 좀 해주지.”
“아? 그랬나? 깜빡했네.”
“깜빡은. 참, 어제 일은 잘 해결했어?”
“어제? 그럼, 잘….”
아차! 이게 아닌데. 내 계획은 이게 아닌데. 지금 얘기하면 현정이가 박 주임한테 쪼르르 달려가 이러쿵저러쿵 다 얘기할 거다. 그럼 둘이서 잘됐다며 서로의 손을 부여잡고 자축할 텐데. 그럼 내가 지금까지 고심해서 그리던 그림은 물거품이 된다. 눈치가 빠른 친구라 말을 돌리면 이상한 눈치를 챌 텐데 어떻게 말하지? 이런 변수는 생각지도 못했다.
“뭐해?”
“어? 아니야. 이동 중이라 좀 복잡하네.”
“또 뜬금포 날리신다. 출근은 뭐 하루 이틀 하나? 암튼 어떻게 됐어? 잘 됐어?”
“그게….”
상쾌하게 시작했던 하루의 시작이 이렇게 헝클어질 줄 몰랐다. 극적인 상황을 위해 잘 해결되지 않았다고 말했다가 아닌 걸 알면, 나는 더욱 극적으로 쪼임을 당할 게 분명하다. 자기에게 거짓말했다며 또 오래전, 기억도 나지 않는 몇 가지 일들을 끄집어내 나를 거짓말만 하는 사람으로 몰아갈 것이다. 아…. 솔로몬의 지혜는 이럴 때 필요한데,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이 사람이 오늘 이상하네? 잘 안 됐구나?”
“어? 어. 그게”
“알았어. 뭐, 다시 잘하면 되니까. 너무 무거운 마음으로 오지 마. 내가 박 주임한테 잘 얘기해놓을게. 이따 봐.”
“그…. 그게.”
끊겼다. 아니 끊었다. 언제나처럼 그녀가 먼저 끊었다. 내 얘기는 다 끝나지 않았는데 끊었다. 일단 중요한 건 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지 못한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아니지,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게 아니라 말할 시간을 그녀가 주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판단하고 끊었다. 그게 다다. 이런 걸 손 안 대고 코 풀었다고 해야 하나? 암튼 내가 계획했던 그림은 아직 유효하다. 어쩌면 현정이가 박 주임에게 잘 해결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상황이 더 극적인 효과를 낼 수도 있다. 상황은 더 극적으로 치닫고 있었고, 열차도 내가 도착하자 극적으로 미끄러져 들어오고 있었다.
‘징~징~’
핸드폰 화면에 ‘부장님’이라는 문구가 떴다. 뭐지, 출근 시간에? 보통 출근 시간에 전화를 잘하지 않는 분인데, 몇 번 안 되는 전화 중에서 좋은 소식인 경우는... 기억나지 않는다. 급한 일은 거의 나쁜 소식일 때가 많다. 열차가 들어오고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내리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열차에 타지 않고 한쪽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어?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
“네? 바로 받았는데요?”
“바로 받긴 한참을 기다렸는데.”
하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은 1초가 1분 같을 테니. 급한 것 같은데, 용건은 말하지 않고 왜 늦게 받냐며 다그치는 것도 사실 난 이해가 잘되지 않는다. 급하면 빨리 말하면 될 것을.
“출근 중이지? 차로 오나?”
“네? 아니요. 지하철 타고 가는데요? 무슨 일 있으세요?”
“어디쯤 왔어?”
‘그냥 좀 얘기하시지’
“이제 막 열차 타려고 했어요.”
“어, 그럼 잘 됐다. 내가 깜빡했는데, 오늘 ‘한정’에서 패키징 만들 샘플을 좀 받아오기로 했거든. 근데 내가 깜빡하고 어제 차 수리를 좀 맡겼어. 김 과장이 차를 가지고 좀 다녀와. 좀 늦게 들어와도 괜찮으니”
가끔 느끼는 거지만, 부장님은 참 부탁도 당당하게, 아니 뻔뻔하게 하신다. 샘플을 받아오는 건 그렇다고 쳐도, 지금 시간에 ‘한정’에 들려서 샘플 받고 회사에 들어가면 당연히 점심시간이 다 돼야 들어갈 텐데, 좀 늦게 들어와도 괜찮다니. 이것도 재주라고 해야 하나? 몸을 돌려 내려왔던 계단으로 향했다. 아깝기는 했지만, 카드를 단말기에 대고 지하철 개폐기를 빠져나갔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 조금 낯설었다. 이 시간에 집으로 향한 적이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 차키를 들고 내려왔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는데, 차를 어디에 주차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꼭 필요할 때만 차를 타서, 가끔 이런다. 천천히 걸어가며 키를 눌렀는데, 차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삐삐’ 오른쪽 끝쯤에 불빛을 반짝이며 대답하는 차를 발견했다. 시동을 걸고 내비게이션에 ‘한정’을 찍었다. 예상 소요 시간이 57분으로 나왔다. 일반적으로 막히면 20~30분은 더 걸린다고 봤을 때, 넉넉잡아 1시간 30분은 걸린다고 봐야 한다. 급할 거 없으니 여유 있게 가자는 마음에,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운전하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가끔 운전하면서 라디오를 듣거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시간은 좋다. 시간의 여유만 있다면, 또 하나의 힐링 타임이 되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