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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성 김작가 Aug 23. 2021

뭣이중헌디?

곰 한 마리, 곰 두 마리, 곰 세 마리….

뭐냐고? 회사생활을 잘하면, 어깨에 들러붙는 훈장이다. 야근과 출장 그리고 회식이나 기타 모임 등을 거침없이 소화하는 동안, 놈들이 한 놈씩 들러붙는다. 처음에는 새끼 곰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성장한다. 오랜 시간, 이 곰들이 떨어져 나가지 않은 상태를 전문용어로 ‘만성피로증후군’이라 부른다. 직장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아내들이여! 남자들이 회식이나 출장을 좋아해서 자주 간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물론 개중에는 좋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 어쩔 수 없이 간다. 정말 그렇다. 악처 of the 악처가 집을 지키고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니 “야이, 웬수야!” 라든가 “으이그 으이그 이 화상아!”라는 멘트는 목구멍으로 넘겨주길 바란다. 길바닥에 내 앉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한참 실무를 할 때도 그랬다.

야근과 출장은 기본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테트리스의 긴 막대가 빈 곳에 정확하게 꽂히듯, 캘린더의 빈 곳이 저녁 모임으로 꽂혔다. 일과 관련된 자리라고 하면, 개인적인 약속은 쉽게 덮었다. 심지어는 아내와 약속을 했더라도 일과 관련된 모임이라면, 없다는 거짓말이 무조건 반사로 튀어나왔다.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 다음에 할 일은 하나다, 공손히 전화기를 붙들고 약속을 지킬 수 없는 101가지의 이유 중 몇 가지를, 최대한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나 같은 경우는, 내가 일을 잘해서가 아니라, 일할 사람이 별로 없었다. 1인 3~4역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야근과 출장 그리고 모임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일찍, 아니 칼퇴하는 날이면 집에서 밥을 먹었다.

좋기도 했지만, 낯선 거리를 걷는 것처럼 어색한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왔다. 개인적인 약속을 잡을까도 생각하지만, 되도록 집에서 밥을 먹기 위해 노력했다. 주말 출장도 많았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일찍 집에 들어가야 한다는, 약간의 의무감이었다. 집에 일찍 들어간다고 아이들과 신나게 놀아주거나, 아내와 시간을 보내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한 번은 조금 늦은 퇴근을 하고, 집에 도착해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가족들은 밥을 다 먹은 상태라 혼자서 먹고 있는데, 둘째 딸이 앞에서 조잘조잘 말을 걸어왔다. 친구들과 나눴던 대화부터 무엇을 먹었는지까지 세세하게 다 설명해줬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는데, 아빠 바라기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나를 참 잘 따랐다. 중학생이 된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그때만큼은 아니다. 한참 떠들던 아이가 무심하게 대답만 하던 나에게 불쑥 질문을 던졌다.    

 

"아빠, 아빠 밥 다 먹고 나랑 놀아요, 에?”

건성으로 듣고 있다 이 질문이 들리자, 시소가 튕겨 올라가듯 고개를 들었다. 똘망똘망한 두 눈을 깜빡이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을 보고, “나중에!”라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같이 놀아줄 수 없는 101가지 이유 중, 아이가 마음 상하지 않을 가장 좋은 이유를 찾았다. 뭐 좀 놀아줄 수도 있었지만, 주중 주말 출장과 야근으로 어깨에 곰 두세 마리가 올라와 있었다. 얼른 밥을 먹고 일찍 자야겠다는 계획을 바꾸기에는, 어깨에 들러붙은 곰들의 무게가 상당했다.     


주말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이면, 아내가 아이들을 막아줬다. 

“아빠 피곤하시니까 건들지 마 어?” 이 한마디와 함께 힘차게 문을 닫으면 상황은 종료! 아이들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처져서 돌아가지만, 일단 내가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두 눈을 꼭 감았다. 어느 날부터는, 출장에서 일찍 오면, 어깨에 달라붙은 곰을 얹은 채로 집에 가지 않았다. 곰들로 예민해진 신경이,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였다. 만사가 귀찮은데 아이들까지 달라붙으면, 내 의지로 짜증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곰들과 함께 사우나로 갔다. 

사우나를 좋아하기도 했고, 1시간 정도 땀을 빼고 나면 곰들이 알아서 기어 내려갔다. 곰들을 떨어내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그렇게 피로를 풀고 들어가면 아이들을 반기는 목소리부터 달라진다. 1~2시간 일찍 들어가는 것보다, 조금이나마 가벼운 상태로 들어가는 게, 더 현명하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날은 평일이었다. 그것도 늦은 시간.     


“지금? 오늘은 아빠가 좀 많이 피곤하네? 다음에 더 많이 놀까?”

“칫!”     


아이는 아쉬움과 불만의 표시인 듯 한마디를 던졌다. 그리곤 소파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마음이 짠하긴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다음 날이 쉬는 날도 아니고 오늘만 사는 사람도 아닌데. 약간의 미안한 마음을 누르고,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밥이 중간 정도 줄어들었을 때, 핸드폰에서 알람 소리가 났다.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핸드폰을 봤다. 시스템 업데이트 안내였다. 생각할 것도 없이 손가락으로, 업데이트라고 표시된 부분을 눌렀다.      


“아빠, 뭐 하는 거예요?”

아빠의 일거수일투족이 항상 궁금한 둘째였기에, 알람 소리를 듣고 바로 튀어온 듯 보였다.

“어? 아~ 핸드폰 업데이트하는 거야.”

“핸드폰 업데이트? 업데이트가 뭐예요?”

“업데이트? 글쎄, 뭐라고 해야지? 그냥 뭐, 기능을 추가하는 거?”

“기능은 뭔데요?”

“기능? 핸드폰에 깔린 거 있잖아. 그것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시작됐다. 싸늘했다. 이러다 핸드폰 어플들의 이름과 언제 사용하는지에 대한 설명까지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아! 그러면 안 되는데. 아이들이 다 그렇다지만, 둘째는 유독 심했다. 그렇게 물어보는 이유가, 몰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렇게라도 아빠랑 얘기하고 싶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암튼. 빠른 마무리가 필요했다. 

    

“이제 가서 놀까?”

“근데, 업데이트는 왜 해요?”

“핸드폰에서 하라니까.”

무심한 듯 그렇게 답을 하고, 국을 뜨기 위해 숟가락을 담갔다. 다시 한번 싸늘했다. 어? 반응이 느린 아이가 아닌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숟가락을 국에 담근 채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의 입술은 더 나올 수 없을 만큼 앞으로 나와 있었다. 그러곤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로 한마디 내뱉었다. 

“칫! 내 말은 안 들어주고. 핸드폰 말은 들어주고….”     


정수리에서부터 시작한 찌릿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무 생각 없이, 물어보는 말에 대답한 것뿐이었는데, 뭔가 대단히 잘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아이의 한 마디가 귓전을 맴돌았다. 힘없이 내뱉은 모습이, 더 안쓰럽게 느껴졌다. 차라리 신경질이라도 냈으면, ”어? 어디 아빠한테?”라며 뭐라 했을 텐데. 맥 빠진 혼잣말에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아이의 실망감이 생각보다 컸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자기가 놀아달라는 말은 안 들어주면서, 핸드폰이 업데이트하라는 말은 잘 들어주는 아빠라…. 아이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니, 내가 나빴다. 아까처럼 터벅터벅 걸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에 눈이 떼지지 않았다. 아이에게 무심코 한 말과 행동이, 아이에게는 큰 의미가 되고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아이에게 아빠 수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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