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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성 김작가 Jun 26. 2021

7. 행주 사건

대화

늦은 귀가로 혼자서 밥을 먹는데, 식탁에 국물이 떨어졌다.

국물이 식탁에 오래 묻어있으면 굳어져 닦아내기 어렵다. 자국이 잘 지워지지 않을 때도 있고, 지워지더라도 미세한 그림자 같은 흔적이 남기도 한다. 바로 닦아야겠다는 마음에, 둘째 딸에게, 행주 좀 가져오라고 시켰다. “네!” 씩씩하게 대답한 아이는 내가 앉아있는 뒤쪽 싱크대로 향했다.      


식탁과 싱크대는 마주 보고 있어 바로 가져올 수 있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오래 걸릴 일도 아닌데…’ 하면서 뒤를 돌아봤는데, 아이는 여기저기 둘러보며 행주를 찾고 있었다. 눈으로 싱크대 위를 훑어봤지만, 행주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은 두루마리 휴지였다. “거기 있는 휴지를 가져와~” 이번에도 씩씩하게 대답하고 휴지를 가져왔다.      


아이에게 물었다.

“행주 없으면 휴지를 가져오지 왜 계속 행주를 찾았어?”

“아빠가 행주 가져오라고 했으니까요!”

아이는 똘망똘망한 두 눈을 끔벅거리며,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맞는 말이다. 난 행주를 가져오라고 했지, 행주가 없으면 떨어진 국물을 닦을 수 있는 다른 무언가를 가져오라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더라면 어땠을까?

“국물을 흘렸으니, 행주 아니면 닦을 것을 좀 갖다 줄래?”

아이는 먼저 행주를 찾았을 것이고, 행주가 없으면 싱크대에 올려져 있던 두루마리 휴지를 들고 왔다고 본다. 만약 휴지가 없었다면, 그 외에 닦을 만한 무언가를 가져오거나, 닦을만한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을 것이다. 조금 더 기대해본다면, 화장실에 가서 휴지를 조금 떼 왔을 수도 있다.


아이들에게 하는 질문을 돌이켜 생각해 봤다.

여유가 있을 때는, 시간을 가지고 생각할 수 있도록 질문을 한다. 때로는 아이들이 무언가를 질문했을 때, 이렇게 역으로 질문하기도 한다. “우리 딸은 어떻게 하고 싶은데?” 어떤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스스로 판단하게끔 하기 위해서다. 아이가 스스로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라면 결정해주고 설명해주면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스스로 판단하게 하는 것이 좋다.   

   

부모가 일일이 다 선택해주고 결정해주면 성장해서 문제가 생긴다.

본인이 선택하고 판단해야 할 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가 선택해줬으니까. 생각 근육이 단련되어 있지 않아, 선택하고 판단하기 위해 생각하기보다, 누군가가 결정지어주길 바란다. 점심 메뉴를 고르는 것처럼,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선택은 크게 무리가 없다. 진로를 결정하거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선택과 판단도 그렇다. 당연히 자신이 결정해야겠지만,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상의할 시간이 충분하다. 천천히 선택하고 결정하면 되기 때문에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문제는 긴박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다.

누구에게 질문할 여건도 되지 않고, 짧은 시간에 선택해야 할 때다. 아주 간단한 문제일 수도 있지만, 매우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다. 사회생활을 하면 이런 순간을 종종 마주하게 된다. 고스톱처럼, ‘고’를 외칠지 ‘스톱’을 외칠지, 순간적인 판단으로 결정해야 할 때다. 아이가 물가에 가는 것이 걱정된다면, 걱정만 하거나 물가에 가지 말라고 하지 말고, 수영을 가르쳐야 한다. 인생에서 수영하는 법이, 생각하는 힘이다. 생각하는 힘은 질문을 통해 단련된다. 생각 근육을 단련해야, 선택하고 판단할 힘이 생긴다.    

 

어른들은 급한 마음에, 질문의 폭을 매우 좁힐 때가 있다.

‘닦을 것’이 아닌 ‘행주’로 명명한 것처럼 말이다. 질문의 폭이 좁으면, 질문을 받는 사람은 대안을 찾기 어렵다. 이것이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이다. 아이들이 더 많은 대안을 찾고 제안할 수 있는데, 어른들의 기다려주지 못하는 짧은 인내로 그 생각을 막고 있다. 애들이라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모른다고 단정 짓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 아이들의 생각 근육을 단련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생각하는 ‘그것’을 지정하지 말아야 한다. 폭넓게 판단할 수 있도록, 아이들에게 질문하는 연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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