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어디서 어떻게 만날지 모르니,
최악으로 흐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것』
사람의 인연이란 참 알 수 없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다시는 안 볼 것 같은 사람을 중요한 길목에서 만날 때가 있다. 내가 주도권을 쥐고 있으면 모를까, 반대의 처지라면 그만큼 난감한 상황은 없다. 오래전 들은 이야기 하나가 생각난다. 거래처와 협력업체의 관계로 지내던 사람이 있었다. 소위 말하는 갑을 관계다. 갑의 처지에 있는 사람은 을의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모질게 굴었다고 한다. 마치, 영원히 갑의 위치에 있을 것 같은 느낌으로 말이다.
여기서, 반전이 일어났다.
을의 처지에 있던 사람이 갑의 회사에 경력직으로 지원했고 합격한 거다. 중요한 건 위치다. 갑이라는 위치에서 군림했던 그 사람의 직속 상사로 온 거다. 이 말을 듣고, 드라마 같은 상황이라 생각됐다. 일부러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감탄이 절로 나왔다. 갑의 위치에 있던 사람은 누가 뭐라 하지 않았는데,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자기가 한 일을 자기가 알았던 모양이다. 그 행동이 떳떳하지 못한 것이라는 것도 말이다.
“사람 어디서 어떻게 만날지 모른다.”
퇴사를 앞두고 제멋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후배들에게 했던 말이다. 퇴사하면 이제 끝이라는 생각에 마음과 행동이 흐트러지는 사람들이 많다. 동종 업계에 계속 있다면, 언젠가는 어떤 방식으로도 만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업종을 바꾸더라도 오다가다 마주칠 수 있는 게 사람 인연이다.
직접 마주치진 않더라도, 간접적으로 연결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예를 들어, 퇴사한 직원이 타 회사에 지원했을 때, 그 책임자가 연락을 주는 경우가 그렇다. 안 좋은 이미지를 남기고 간 직원을 좋게 말해주기는 어렵다. 그 책임자와 친분이 있는 관계라면 더욱 그렇다. 잘못 이야기해 줬다가 좋았던 관계가 틀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나도 100% 그렇다고 말하긴 어렵다. 마주친다면 껄끄러운 사람 몇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내 처지에서 말하는 거라 편파적(?)으로 느낄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들에게 내가 잘못한 건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람들이 나에게 잘못한 부분이 있다. 그들은 자기에게 해준 것은 기억하지 못하고, 서운한 감정만 토로했다. 대부분이 서운한 감정이 더 기억날 수는 있다. 하지만 표현 방식이 매우 옳지 못했다.
내가 인지하지 못했던 부분도 분명 있었다.
그것을 알고 나서는 마음이 짠하기도 했다. 하지만 표현 방식으로 그 마음도 한순간에 묻혀버렸다. 그래서 아무리 화가 나거나 서운한 마음이 있더라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표현해야 한다. 잘못된 표현 하나로, 사실 여부가 가려지게 되기 때문이다. 집단으로 항의할 때, 표현 방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같은 이유라 생각된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할지라도 표현 방식이 옳지 못하면, 그 또한 좋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사람은 만날 때보다 헤어질 때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아마 가장 마지막에 남은 기억이라 그러지 않을까 생각된다. 처음에 아무리 좋았던 관계도 틀어져서 헤어지면, 틀어질 때의 서운함과 속상함만 남게 되는 게 그렇다. 헤어지는 상황이 좋은 상황보다는 안 좋은 상황일 때가 많기는 하지만, 최소한 더 안 좋은 상황으로 몰고 갈 필요는 없다. 그런 분위기로 흐르더라도 최소한으로 마무리할 필요가 있다.
지는 게 이기는 거라는 말을 그리 선호하진 않는다.
하지만 헤어질 때는 새겨둘 필요가 있는 말이다. 다시 만날 때 혹은 어떤 상황이든 마주치게 될 때, 당당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때린 사람은 발 뻗고 자지 못한다는 말. 요즘은 이 말도 무색하게 느낄 만큼 황당한 사건이 많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때린 사람은, 그때는 통쾌할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마음의 짐이 점점 무거워진다. 그렇게 믿는다. 따라서 마음에 짐을 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상대의 마음을 때리지 않는 게 최선이다. 잠깐만 참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