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3. 본질

by 청리성 김작가
욕심과 결핍의 상태에서 벗어나 온전히 집중해야 할 중심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 있다.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왜 손가락 끝을 보느냐?” 달마대사가 한 말로,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달을 가리키며 제자에게 말을 하는데, 제자가 손가락 끝을 보자,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달인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있으니 대화가 제대로 이뤄질 리 없다. 주요한 안건을 논의할 때도 그렇다. 논의하고자 하는 핵심은 바라보지 않고 부수적인 것에 집중하게 되면, 방향이 틀어지게 된다.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처럼,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유가 뭘까?

논의하고자 하는 핵심에 집중하지 못하고, 부수적인 것에 집중하는 이유 말이다. 그 이유를 잘 표현하는 속담 하나가 떠오른다.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다.” 제사를 지내는 것이 핵심이고, 제사를 지내는 데 필요한 것이 제사 음식이다. 하지만 제사에 집중하지 않고 제사상에 올려진 음식에만 관심을 둔다. 어릴 때 제삿날을 떠올리면 그렇다. 그때는 생밤이 그렇게 맛있었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는 동안 생밤에만 눈이 가 있었고, 제사가 끝나자마자 생밤으로 손이 갔다. 어른들은 이런 내 모습을 보면서, 위에 언급한 속담을 말씀하셨다. 생밤을 먹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제사는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렇듯 잿밥에만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뭘까? 욕심과 결핍으로 설명할 수 있다.


욕심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취하고 싶은 욕심에 마음이 쏠리면, 본질을 바라보지 못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보지 않으려고 하거나 보이지 않는다. 욕심이라면 보지 않는다. 내가 취하고 싶은 것이 저것이니, 본질인 이것은 다른 무언가로 살짝 가린다. 정당성이라는 덮개를 이용한다. 자기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거다. 정당성은 자기 욕심 때문에 한 행동을, 타인을 위한 것이라고 스스로 거는 체면이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구한다. 자기 욕심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것이거나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강조한다. 그래야 마음에 짐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결핍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내가 제삿날, 생밤에 마음을 뺏겨 제사에 집중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생밤이 먹고 싶은 것을 욕심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결핍에 더 가깝다. 평소에 생밤을 먹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배고픔이나 졸림, 추위와 더위도 그렇다. 생리적으로 느끼는 결핍 또한 본질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든다. 배고파서 쓰러질 지경인데, 이상(理想)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성인(聖人)이면 모를까, 일반적인 사람은 가당치 않다. 생리적인 결핍이 해소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어떤 것도 온전히 집중하기 어렵다.


욕심과 결핍이 온전히 채워질 순 없다.

욕심은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더 갈증을 느끼게 만든다. 한번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욕심을 단박에 끊어낼 수는 없지만, 최소화하는 방법은 현재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감사하는 마음은 욕심의 갈증을 그나마 해소해 줄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더 많이 벌고 싶은 욕심을 쫓으면서 ‘더. 더. 더’ 하면서 산다. 갈증이 채워지기보다 더 심한 갈증을 느끼게 된다. 현재 생활을 유지할 정도의 수입이라면 그것에 감사하면 어떨까? 갈증을 덜 느끼지 않을까? 결핍은 위로받아야 할 부분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정당화시켜줄 수는 없다. 그래서 할 수 있다면, 완전히 고갈된 상태로 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너무 배고프거나 피곤한 상태가 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본질에 집중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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