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4. 회개

by 청리성 김작가
내가 하지 않으면,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라도 반드시 치러야 할 대가


매번 반복되는 일이 있다.

그 일이 참 좋은 일이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지만, 기대는 하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말이다. 지난 해, 노동자 한 명이 안타까운 죽음을 맞았다. 그리고 회사는 적절한 대응을 하지 않았다. 공식 사과는 했지만, 그게 사과인지는 모르겠다. 사과라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그 마음을 전하는 것인데, 그 마음을 느꼈다는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다. 그리고 사과는 유가족에게 해야지, 언론을 통해 대국민 사과를 한다는 게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 사과해야 하는 당사자도 구분하지 못하는 사과라…. 글쎄다. 왜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마음을 전달되는 방법은 하나다.

진심이다. 이건 초등학생도 알고 있는 아주 기본적인 상식이다. 내 마음이 타인의 마음에 닿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진심에 담아서 전달하는 거다. 받아본 사람은 안다. 진심을 담아 전달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말이다. 어쩌면 이런 진심의 마음을 받아보지 못해서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 모르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을 줄 수 있다는 말처럼, 받아보지 못했으니 그게 어떤 느낌인지 모를 수 있겠다는 말이다. 맛보지 않은 음식인데 “어떤 맛이야?”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 수 있겠는가?


절대 감싸는 건 아니다.

내가 누구를 감쌀 처지도 아니지만, 정당화시키기 위해 이렇게 말하는 건 아니라는 거다. 누군가는 항상 피해만 본다. 누군가는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는 생각으로, 조속한 처리보다 뭉개고 있다. 이런 모습이 반복된다. 그게 참 마음이 쓰리다. 왜 반복될 수밖에 없는지, 왜 해결이 되지 않는지, 방법은 없는지 답답할 노릇이다. 답답하고 안타까운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사건이 쟁점으로 붉어지면, 이렇게 저렇게 해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잊힌다. 취할 수 있는 다른 이득이 발견되면, 그쪽으로 쏠리기 때문이다.


상식적이지 않다.

이런 일련의 일들이 상식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배워왔고 지금도 배우고 있는 정의(正義)가 보이지 않는다. 성실(誠實)이라는 단어도 이제는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꼭 필요한 단어가 아닌가?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고 해도, 정의가 실현되길 바라야 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몫을 잘 수행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일이 벌어지면, 과연 누가 아이들 혹은 후배들에게 당당하게 이 단어들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무슨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 슬픔을, 그 억울함을, 그 속상함을, 과연 누가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짐작은 할 수 있겠지만 이해한다고 말하는 건, 글쎄다. 다만 너무 오랫동안 그리고 너무 크게 아픔을 겪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더불어 억울하게 돌아가신 영혼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드린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줬다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대가는 어떠한 형태로든 치르게 된다. 자신이 아니면 자신이 사랑하는 그 누군가가 대가를 대신 치르게 된다. 이것을 명심했으면 한다. 내가 치르지 못한 대가는 어떻게든 이어서 갚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 본인이 직접 해결하는 게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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