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받으려고 하기보다, 먼저 내어놓으면 얻을 수 있는 벅찬 마음
<만 원의 행복>
한동안 유행했던 프로그램 제목이다. 만 원으로 하루를 생활해야 하는 프로그램이다. 출연자들의 모습을 보면 ‘행복’이라는 말보다, ‘처절’이라는 말이 더 어울렸다. 하루에 사용하는 비용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건 음식값이다. 먹어야 생활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물가가 낮기는 했지만, 그때도 만 원으로 하루의 끼니를 다 해결하는 건 무리였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음식을 얻어먹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여러 미션을 통해 얻어먹는데, 그 모습이 처절해 보였다. 프로그램에 재미를 위해 그런 것으로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먹고 살기 위한 몸부림이 진심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냥 흘려서 쓸 수 있는 만 원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얼마나 유용하게 쓰이는지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다.
나에게도 만 원의 행복이 있다.
만 원의 행복을 시작한 지는, 15년도 더 된듯하다. 딱히 날짜를 세진 않았다. 만 원의 행복을 시작한 이유에, 특별한 계기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시작했다. 굳이 이유를 달자면, 순간적인 계시(?) 때문이었다. 나는 가끔, 어디선가 솟구쳐 올라오는 생각의 끝자락에, 소름이 돋는 메시지를 발견할 때가 있다. 만 원의 행복도 그런 경우다. 가능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눈 딱 감고 시작했다. 뭐, 만 원 가지고 눈까지 딱 감아야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때는 그랬다. 매우 부담이었다.
뭐냐고?
헌금이다. 매주 주일미사에 봉헌하는 헌금의 금액을 만 원으로 정한 거다. 일반적으로 천주교 신자들은 봉헌하는 헌금이 매우 짜다고 한다. 천주교 신자를 가리켜, ‘천 원 신자’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우스갯소리긴 하지만, 마냥 부정할 수만도 없다. 신부님들께서도 강론 시간에 가끔 언급하시는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가 생각난다. 라디오 방송에서 들은 내용이다. 신부님이 한 강연에서 이렇게 질문하셨다. “천주교 신자가 헌금을 내려고 지갑을 봤는데, 5만 원권 지폐와 1만 원권 지폐가 보입니다. 자! 얼마짜리 지폐를 낼까요?” 청중들은 “만 원이요!”라고 답을 했다. 신부님은 “아닙니다. 어떻게든 천 원짜리 찾아서, 천 원 냅니다.” 청중은 물론, 나도 빵하고 터졌다.
나도 천 원 신자였다.
사실 헌금을 아꼈다기보다, 형편이 그랬다. 많이 봉헌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2차 헌금이나 특별헌금까지 있으면 더했다. 하지만 그때, 이런 질문을 나에게 던지게 되었다. “만 원을 낼 수 있는 여력이 돼서 만 원을 내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만 원을 내면 계속 만 원을 낼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되지 않을까?” 뒷골이 찡하고 울렸다. 만 원을 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내는 게 아니라, 먼저 봉헌하면 그렇게 되도록 역량을 채워주신다는 메시지였다. 역량이 되면 내겠다는 건 조건부다. 하지만 나에게 요구된 건, 조건 없는 믿음이었다. 그래서 눈 딱 감고 그렇게 했다. 밖에서 점심을 먹을 때, 밥값을 보고, 조금이라도 싼 밥을 먹는 노력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실제 그랬다.
만 원을 봉헌하니 만 원을 봉헌할 수 있는 역량과 환경이 만들어졌다. 처음부터 그렇게 된 건 아니었다. 점점 부담이 점점 줄어들더니, 어느 때부터는 부담이 되지 않았다. 그때 깨달았다. ‘아! 정말이네?’ 먼저 내어놓으니, 그렇게 내어놓을 수 있는 여건이 된 거다. 사람 관계도 마찬가지다. 내가 먼저 내어주지 않고, 상대방이 주는 것을 보고 내어주겠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상대방도 내어놓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서로 내어놓지 않고 조건만 따지다, 아무 소득 없이 헤어질 수도 있다.
사실 내가 그렇다.
먼저 내어놓기를 주저할 때가 있다. 다 그런 건 아니다. 때로는 정말 아무 조건 없이 내어놓는 것도 있다. 내가 할 수 역량이 된다면 그렇게 한다. 그 안에서 얻는 행복도 참 좋다. 하지만 금전적인 것은 잘 안된다. 빠듯한 형편이라, 선뜻 내어놓기가 부담스럽다. 내 믿음이 아직 여기까지 미치지는 못했나 보다. 성공 경험은 또 다른 성공 경험을 부른다고 했던가? 헌금으로 경험한 성공 경험을, 이제 다시 시도해 봐야겠다. 조건부가 아닌, 조건 없는 내어줌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