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0. 정의(正意)

by 청리성 김작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아닌, 사람을 온전히 바라보고자 하는 기준


몸의 중심은 어디일까?

여기서 말하는 중심이란, 위치도 중요하지만, 역할의 중요성도 그에 뒤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치로 봤을 때, 몸의 앞을 보면 배꼽이라 말할 수 있고 뒤를 보면 허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몸의 중심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대부분 허리라고 말한다. 이유는, 역할의 중요성 때문이라 생각한다. 허리 통증으로 고생한 사람이나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더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허리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한다. 허리로 고생한 한 분이, 이렇게 한 말이 기억난다.

“허리는 아파본 사람만 알아요. 얼마나 아프고 힘든지.”

어떤 통증이나 불편함을 경험한 사람들은, 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허리 통증으로 고생한 사람들은, 특히 이런 표현을 많이 한다. 경험으로 겪은 느낌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고 괴로운지를 말이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말을 말라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이라고 하면 애 낳는 고통을 떠올린다.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하다는 사람도 있으니, 그 힘듦을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허리의 고통은 단지, 통증 때문만은 아니다.

아! 내가 단정 지을 순 없으니, 그렇게 생각한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 통증에서 오는 고통도 있지만, 다른 것을 할 수 없다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울 수 있다. 코로나로 일주일간 자가 격리를 할 때도 그랬다. 몸이 그다지 아프진 않았지만, 방에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이 더 힘들었다. 원래 해왔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다는 자체가, 답답하고 고통스러웠다. 통증은 한 부분에서 왔지만, 그 여파는 온몸으로 퍼진다.


몸에 중심이 있듯, 마음에도 중심이 있다.

아니, 있어야 한다. 마음의 중심은, 몸의 중심과 다르게 사람마다 다르다. 마음의 중심이 몸의 중심과 달리 보이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고, 사람마다 생각에 차이가 있어서 일 수도 있다. 딱히 무엇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건,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정의(正義)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바람직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의 중심이니 말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읽어보진 않았더라도, 한 번쯤은 들어본 책 제목이라 생각한다. 이 책에서, 판단해야 하는 여러 가지 상황을 언급한다. 이때 어떤 선택을 할지 독자에게 묻는다. 하지만 그 어떤 선택도 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열차가 들어오는데 그대로 두면 여러 명이 치인다. 철로의 방향을 바꾸면 한 명이 치인다. 그대로 둘 것인가? 철로의 방향을 바꿀 것인가? 어떤가? 쉽지 않다. 어떤 선택을 하든, 누군가는 희생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판단하듯, 사람의 생명을 다수결의 선택처럼 해도 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정의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문제일까?”

이 책에서 던진 질문이다. 정의가 반드시, 누가 옳다고 혹은 누가 그르다고 판단하는 기준으로 여겨져서는 곤란하다는 표현으로 해석된다. 정의를 재판관의 역할로 내세운다면, 누군가에게는 돌을 던져야 한다. 옳음이 있다면 그름이 있다. 그 그름에 돌을 던져야 한다. 그래야 옳음이 정당성을 지킬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이 장면이 떠오른다. 한 여인을 중앙에 놓고 돌을 던지기 위해 군중들이 서 있다. 여인을 단죄하기 위해서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에게, 누구든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사람들은 하나둘 돌을 내려놓고 자리를 떠났다.


왜 떠났을까?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거세게 몰아붙이던 사람들이 왜, 예수님의 한마디에 수그러져서 그 자리를 떠났을까? 자신도 죄가 있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의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는 보지 못했다. 우리가 변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변하지 않는 이유가, 그 우리에, 자신은 포함하지 않아서라고 하지 않는가? 결국, 정의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수단이 된다면, 자신의 그름은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따라서 정의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수단이 아닌, 사람을 사람으로 온전히 바라보는가에 대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 누구라서가 아니라, 그냥 사람이라서라고 말이다. 그것이 진정한 정의의 출발이어야 한다. 그러면 사람들의 신의로, 자신의 몸을 두를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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