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고 싶은 것만 바라보면서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되는 시작
증거는 사실관계를 밝히는 강력한 도구다.
이견으로 서로 다툴 때, 증거는 더 강력한 도구가 된다. 사람이 그 역할을 하면, 증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누구의 말이 참인지 혹은 거짓인지 따져 물을 수 있다. 두 사람의 말이 다를 때, 삼자대면이라는 것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로 다투는 두 사람과 함께했거나 이야기한 사람을 동석해서 사실 여부를 따져 묻는다. 그러면 오래지 않아, 결론이 나온다. 거짓을 사실처럼 이야기한 사람이 더는 버틸 재간이 없다. 이런 사람이 있었는데, 참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금방 밝혀질 진실을 왜 그렇게 감추고 거짓말을 하는지 말이다.
증거라고 하면, 바로 생각나는 곳이 있다.
법정이다. 법정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범죄를 입증하는 검사 측과 이를 부인하는 변호사 측이 서로의 의견을 주장한다. 자신들이 내세우는 증거 혹은 증인을 앞세워, 자신의 논리가 맞는다고 판사에게 이야기한다. 그러면 판사는 증거와 증인을 중심으로 누가 옳은지 판결을 내린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증거재판주의’를 채택하고 있다고 말한다. 증거재판주의는 범죄사실의 인정은 감정이나 추측이 아닌 증거에 의해야 하고, 유죄판결을 하려면 합리적인 관점에서 무죄의 가능성을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엄격한 증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열 도둑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가짜 도둑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법언에 대응하는 형사소송의 대원칙이다. (출처: 나무위키)
증거를 강조하는 건, 무죄 추정의 원칙과도 연결된다.
앞서 설명한 내용에서도 알 수 있다. ‘무죄의 가능성을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표현할 만큼, 확실하지 않으면 유죄라고 볼 수 없다는 의미다. 확률로 따지면 아쉬운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잡아야 할 범인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운명이 달려 있으니, 확률로 따져서는 곤란하다. 억울하게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1% 아니 0.1%의 확률이 되더라도, 누군가는 한평생을, 억울한 옥살이를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언론에서 이런 분을 봤다. 국가에서 지난 세월에 대해 보상해 준다고 하는데, 글쎄다. 과연 그게 진정한 보상이 될 수 있을까? 지나간 시간은 그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다. 가장 좋은 보상은 피해 본 것으로 해줘야 하는데, 시간은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니 모든 일에 완벽한 판단을 내릴 순 없다.
하지만 이 질문에 관한 답이 명확해야 한다. “정말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공정하게 따져봤는가?” 증거는 객관적이라 볼 수 있다. 드러난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증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질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열린 문의 손잡이를 잡은 사진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들어가는 사람인가? 나오는 사람인가? 들어가는지 혹은 나오는지에 따라, 판결이 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쉽게 단정 지을 순 없다. 하지만 주장한다.
내가 믿고 싶은 방향으로 주장한다.
그리고 그렇게 몰고 간다. 왜 이런 상황이 있지 않은가? A라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의 말이 맞는 것 같고, B라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 또 그 사람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 놓이는 이유는, 사실 여부를 알 수 없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논리적으로 이상하지 않다면, 모든 말에 수긍이 간다. 이런 상황이라면 아무리 많은 증거가 있다고 해도, 소용이 없을 수 있다. 믿으려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증거 보다 우선되어야 할 건 마음이다.
편견을 갖지 않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겠다는 마음, 악의적으로 짜 맞추지 않겠다는 마음, 사실을 받아들이고 믿는 마음 등이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하는 잘못은 “그럴 수 있어!”라고 넘기지만,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이 하는 잘못은 “그럼, 그렇지!”라며 고깝게 보면 곤란하다는 말이다. 좋고 싫고의 문제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옳고 그름 혹은 잘못을 따지는 문제라면 잘 살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