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된 삶은,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삶입니다.

by 청리성 김작가

영화 <의뢰인>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납니다.

법정 장면인데요. 아내를 죽였다는 이유로 피고인이 된 남자가 있습니다. 검사는 이 남자가 범인이라고 확신하면서 추궁합니다. 반대편에서는, 이 남자가 범인이 아님을 입증하는 변호사가 있습니다. 남자는 자신이 아내를 죽이지 않았다고 호소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아직도 아내가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 같다고 말합니다. 법정에 있는 사람은 물론, 영화를 보는 관객도 그의 말에 공감하게 됩니다. 공방을 펼치는 변호사와 검사를 봐도 그렇습니다. 변호사가 검사를 요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둘은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마지막 변론을 합니다.

변호사는 지금 뒷문으로 남자의 아내가 들어올 거라고 말합니다. 법정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고, 검사의 표정도 매우 뒤틀립니다. 변호사는 숫자를 셉니다. “하나, 둘, 셋” 모두 뒷문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곧 문이 열릴 것이라 기대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남자의 아내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는 변호사의 전략이었습니다. 검사의 주장을 의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변호사는 법정에 있는, 뒤를 돌아본, 사람들에게 강조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남자의 아내가 죽었는지 의심하고 있는 거라고 말이죠.


아주 멋진 변론이었습니다.

검사도 멋진 변론이었다고 칭찬합니다. 그리고 한마디를 얻습니다. “근데, 셋 셀 때 한철민. 출입문 쳐다보지도 않았어.” 한철민은 피고인의 이름입니다. 아내가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 같다고 했던 사람이 문을 쳐다보지 않은 거죠. 법정에서, 유일하게요. 이 장면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확신하고 있다는 겁니다. 아내가 절대 문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말이죠. 다른 말로 죽음을 확신한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변호사는 이 말과 함께 사무장의 연락을 받고, 의심스러운 몇 가지 단서를 발견합니다. 변호사가 남자의 범죄 사실을 찾은 거죠.

아내가 살아있다고 믿었다면, 문을 쳐다봤을 겁니다.

그것이 아내가 살아있다고 믿는 사람 혹은 그랬으면 좋겠다고 희망하는 사람의 모습일 겁니다. 하지만 남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고 희망도 하지 않은 겁니다. 죽음을 확신한 거죠? 자기가 죽였으니까요. 남자가 문을 쳐다봤다면, 정말 확실한 거짓말이 될 수 있었을 겁니다. 죽음을 알면서 쳐다본 거니까요. 사람은 자기가 알고 믿는 대로 행동합니다.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거짓이라 말합니다.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은 거짓입니다.

가겠다고 말하고 가지 않는 것은 거짓입니다. 하겠다고 말하고 하지 않은 것도 거짓이지요. 실제의 삶과 다른 사진과 영상을 SNS에 올린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납니다. SNS의 부작용을 꼬집은 건데요. 충격적일 정도로 완전히 다른 삶인 사람도 있었습니다. 현실은 어두운 동굴 안인데, SNS는 빛의 광장에 사는 것으로 포장하는 겁니다. 이 정도면 과대 포장을 넘어, 거짓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실상은 행복하지 않은데, 매우 행복한 사람처럼 사진을 찍고 공유합니다. 얼마나 헛헛할까요? 그렇게 하는 사람의 마음도 그리 좋진 않을 겁니다.


거짓은 마음과 영혼을 힘들게 합니다.

마음과 영혼이 편해지기 위해서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항상 일치할 순 없겠지만, 생각의 중심에 두고 계속 맞춰가야 합니다. 그 노력이 모이면 간격은 점점 줄어들고 일치하는 순간이 많아질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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