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바로 보지 못할 때가 있다.
눈을 피한다는 말이다. 상대방의 목 혹은 가슴 쪽으로 시선이 간다. 고개를 푹 숙여 바닥을 보거나 자신의 발 앞부분을 보기도 한다.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한 행동이다. 학교 다니기 전에는 아빠와 엄마 앞에서 그랬고, 학교 들어가서는 선생님 앞에서도 그랬다. 사회에 나와서는 나보다 윗사람이나 계약서에 ‘갑’이라 명시된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한다. 계약서가 아니더라도, 위치가 그러면 또 그렇다.
언제 그럴까?
실수했거나 잘못했을 때다. 혹은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할 때다. 실수하거나 잘못하면,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기가 어렵다. 미안한 마음도 있고, 어떤 질타가 쏟아질지 몰라 두렵기 때문이다.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할 때도 그렇다.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전하는 것 자체가 그렇다. 메신저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좀 다른 게 있다면,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에 대한 태도 차이다. 아는 사람에게는 앞서 말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행동한다. 모르는 사람은 어떨까? 진상 고객과 마주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대체로 아는 사람보다는 마음이 덜 무겁다. 시선이 조금은 더 올라가고, 눈을 마주치며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은 이런 차이가 있다.
아는 사람에게는 마음이 더 무겁고 조금 더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품는다. 함께 한 시간이, 그런 마음을 갖게 하는 게 아닌지 싶다. 공동체의 모습도 그렇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이 떠날 때는 아쉬움도 미련도 없어 보인다. 당연한지도 모르겠지만. 잠시 들른 손님처럼 아무렇지 않게, 때로는 인사도 없이 떠나기도 한다. 공동체에 머문 시간이 오래면 어떤가? 아쉬움과 안타까운 마음이 진하게 올라온다. 떠나는 사람도 그렇고 남는 사람도 그렇다. 가까운 사이라면 더 그렇다. 이산가족이 되는 것처럼 서럽게 울기도 하고, 한동안 멍한 상태로 있기도 하다. 함께 한 시간의 힘이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는 관계는 많지 않다.
가족이 가장 가능성이 큰데, 그러지 못하는 가족도 있어 안타깝다. 현재, 함께 사는 사람 혹은 같은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믿을 뿐이다. 가능성일 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러 공동체에 있으면서 깨달은 바다. 오래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 같던 사람이 한순간에 공동체를 떠난다. 내부 갈등이 원인이 되기도 하고, 다른 뜻이 있어 떠나기도 한다. 자의에 의해 떠나기도 하고, 타의에 의해 떠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 일은 모른다고 하는 거다.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느낀다.
그 사람이 공동체에서 어떤 삶을 살아냈는지가 느껴진다. 어깨를 펴고 고개 들며 떠나는 사람이 있다. 지금까지의 생활에 당당했다는 의미다. 반대의 모습을 하는 사람도 있다. 고개를 떨구고 어깨도 쪼그린 채 떠난다. 이 사람은, 스스로 당당하지 못한 거다. 모두가 실제, 이런 두 모습으로 떠나는 건 아니다. 모습은 그렇지 않지만, 떠날 때 하는 말이나 행동을 보면 알게 된다. 당당함과 그렇지 못함을.
떠날 때 고개 들고 떠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떤 공동체든 그리고 언제 공동체를 떠나든, 떠날 때 뒷모습이 아름답고 당당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는 데 필요한 건, 나중이 아니라, 지금이다. 지금이 당당해야 나중도 당당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돌아보는 게 아니라, 수시로 살펴야 한다. 매월 매주 매일, 기간에 따라 자기를 살피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수시로 살펴야 너무 멀리 벗어나지 않았을 때, 바로 잡을 수 있다. 짧은 시간과 적은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오랜 시간과 큰 노력을 들였던 적이 있지 않은가? 이유가 무엇이었나? 시간이 지나고 누적됐기 때문이 아니었나? 누적하지 않아야 할 것을 누적하면 그렇게 된다. 일상의 교훈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