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판단하며 살아간다.
판단의 근거는, 보고 듣는 등의 정보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판단하는 거다. 자기 생각을 판단하는 사람은 없다. 옳은지 그른지 살피기는 하지만, 판단한다고 말하는 건 좀 어색하다. 여기서 질문. 사람은 보이는 대로 판단하는가? 얼핏 생각하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정보를 듣거나 보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정말 그럴까? 그럴 수도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보이는 대로 판단한다고 착각하는 거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본다. 생각하는 대로, 판단한다는 말이다. 보이는 게 먼저가 아니라, 자리를 잡은 생각이 먼저다.
한 노부부가 주택에 살고 있었다.
볕이 좋은 어느 날, 할아버지가 창문을 열고 바깥을 바라봤다. 주택이 모여있던 곳이라, 옆집 마당이 보였다. 빨래한 옷들이 볕을 쬐며 널려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는 그 옷들을 보며 혀를 찼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할머니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옷들이 깨끗하게 빨리지 않아서 그렇다고 답했다. 빨래가 잘되지 않았는데, 그것도 모르고 널은 옆집 사람이 안타깝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할머니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할아버지 옆에선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겼다. 벗긴 안경을 잘 닫아 다시 씌워줬다. 할아버지는 흠칫했다가, 헛기침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빨래한 옷이 더러운 게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안경이 더러웠던 거다. 안경을 닦아야 하는데 애꿎은 옷들만 탓했고, 옆집 사람을 칠칠치 못하게 여겼다. 빨래한 옷이 정보라면 안경은 생각이다. 내 생각이 어떠냐에 따라 정보는 다르게 판단될 수 있다는 말이다.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고 표현하는 것도, 비슷한 의미다. 생각을 빗대어 표현한 색안경의 색상에 따라, 바라보고 판단하는 색이, 그렇게 보인다. 정보나 현상보다, 생각에 따라 판단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이는 매우 위험한 말이기도 하다. 정보가 사람으로 대체될 때는, 더욱 그렇다.
우리는 사람을 판단한다.
판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은연중에 판단한다. ‘저 사람은 좀 차갑게 보이네.’, ‘잘 보이려고 아주 용을 쓰네, 용을 써.’. ‘또 무슨 꿍꿍이로 저러는 거지?’ 등등. 스스로 단정하는 것이 모두, 판단이다. 판단하는 것이 본능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판단을 먼저 한다. 판단할 수는 있다. 사람을 접하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머리가 돌아가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그 판단을 그대로 수용할지 그리고 바로 표현할지의 선택이다. 판단할 수는 있어도, 바로 매듭을 지어서는 곤란하다. 그것을 잘 살펴봐야 한다.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내가 바라보는 것이 잘못된 건 아닌지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나에게 있는 문제를, 타인에게 뒤집어씌울 수 있기 때문이다. 지저분한 안경을 쓴 할아버지처럼 말이다.
누군가를 판단하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그 말에 많이 흔들린다. 흔들린다는 표현보다는, 기준이 된다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모르는 사람이면 더욱 그렇다. 누군가가, 이러저러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면 그것을 기준으로 사람을 보게 된다. 기준을 통해 그 사람을 만나는 거다. 보통은 두 가지 반응으로 갈린다. ‘아! 그래서 그렇게 이야기한 거구나!’, ‘어? 들었던 것과는, 좀 다른데?’ 전자는 기준에 부합할 때 드는 생각이고, 후자는 그렇지 않을 때 드는 생각이다. 후자일 때는, ‘들었던 말을 그대로 믿었으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를 수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끔은 섬뜩하기도 하다. 좋은 사람을 얻지 못했거나 잃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직접 보고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그래야 실수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