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기도에 심취한 때가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친구 따라갔다가 바로 시작했고, 고등학생이 돼서도 운동을 했었다. 3단까지 취득했는데, 검은 띠 이름 앞에 ‘교사’라고 적혀있었다. 중학생부터 그 이하 아이들을 한두 타임 가르쳤기 때문이다. 덕분에 등록비 없이, 운동할 수 있었다. 4단 승단 심사도 볼 수 있었는데, 그때 기억으로 금액이 너무 컸다. 그 비용을 내면서까지 딸 이유가 없어서, 시도하지 않았다. 체육 관련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중,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합기도 학과에 원서를 넣었었다. 실기시험을 치르고, 합격했었다. 합격했지만, 다른 학교에 입학했다.
합기도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운동으로 몸을 다졌고, 다양한 호신술도 익혔다. 몸으로 하는 활동이었지만, 삶의 지혜도 함께 배웠다. 관장님은 호신술 한 동작을 체화하기 위해서, 만 번은 연습해야 한다고 하셨다. 잠결에도 동작이 나오려면, 그만큼 연습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호신술의 종류는 매우 다양했다. 다양한 동작이 있지만, 주요한 몇 가지를 완전히 익히도록 반복하라고 강조하셨다. 골고루 먹어야 하는 식습관과는 달랐다. 숙달하기 위해서는, 단순하고 지루한 과정을 견뎌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반복의 힘을 배운 거다.
중요한 깨달음도 얻었다.
대련(태권도에서 말하는, 겨루기)할 때였다. 상대방이 발로 공격할 때, 자꾸 뒤로 물러났다. 그냥 그렇게 됐다. 뒤로 물러나니까 계속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아니면, 발끝에 걸려서 맞았다. 이 모습을 보다 못한 관장님이, 대련을 멈추고 설명하기 시작하셨다. 상대방이 공격하면 뒤로 물러서지 말고, 오히려 붙으라고 하셨다. “예?” 당황한 나머지, 질문도 아닌 것이, 감탄사처럼 튀어나왔다. 이해할 수 없었다. 공격이 들어오는데 오히려 붙으라니 무슨 말인가? 발차기가 들어오는데 붙을 수 있는가?
관장님은 설명을 시작하셨다.
뒤로 물러서면 계속 쫓기거나 발끝에 걸려서 맞는다. 끝이라면 조금 낫지만, 발등이나 뒷굽 치에 걸리면 치명타를 입는다. 붙으면 어떻게 될까? 시범을 보여주셨다. 대련했던 선배에서 돌려차기를 해보라고 하셨다. 관장님은 상대방이 돌려차기하는 순간, 앞으로 미끄러지듯 한 발을 내디뎠다. 말처럼 상대방에게 붙은 거다. 상대방의 허벅지가 관장님 옆구리에 닿았다. 충격이 거의 없어 보였다.
원리는 이랬다.
누군가 막대기로 때린다고 해보자. 막대기 끝에 맞으면 아프다. 하지만 가까이 붙어서 맞으면 어떨까? 손과 가까운 부분에 맞으면, 아프지 않다. 스스로 해봐도 알 수 있다. 30cm 자가 있다면, 자 끝으로 자기 팔뚝을 때렸을 때와 손잡이 근처 부분으로 때릴 때의 느낌을 비교하면 된다. 공격하는 막대 혹은 발차기에서 가까울수록 타격감이 덜하다. 다른 말로 하면, 멀어질수록 아프다는 말이다. 이 원리를 설명 듣는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연스레 입이 벌어졌다. “아!”를 연발하기만 했다. 다른 관점이었기 때문이다. 공격하면 당연히 뒤로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붙어야 충격이 덜하다니 말이다.
방어하는 방법에서, 깨달은 것은 이렇다.
일상에서 나를 공격하는 사람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된 거다. 물러설수록 계속 밀린다. 물러서다 맞으면 더 아프다. 공격할 때는 붙어야 한다. 오히려 붙어야 한다. 그래야 충격이 덜하다. 잘 풀리면, 오히려 더 가까워질 수도 있다. 일상에서 공격하는 사람에게 물러서는 것은, 속상해하는 거다. 괴로워하는 거다.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다른 사람과 같이 씹는 거다. 가까이 다가가는 건, 어떻게 하는 걸까? 측은하게 여기는 거다. 그렇게 하는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봐주고 안타까워해 주는 거다. ‘저렇게 하면, 자기만 손해인데….’, ‘오죽 안 풀리면 저럴까!’ 등등 말이다.
처음에는 쉽지 않다.
공격하는 사람을 받아들이기가 어찌 쉽겠는가. 쉽지 않지만 그렇게 했을 때, 마음에 평화가 올라온다. 주책없이 뛰던 심장이 차분해지고, 헝클어진 머릿속이 정리된다. 몇 번 그렇게 하면 마음이, 진심으로 그렇게 바라보게 한다. 진심으로 안쓰럽게 느끼고 안타까워하는 거다. 신기한 경험이 된다. 무엇보다 자기 마음을 잘 지킬 수 있다. 내 마음이 잘 지켜져야, 타인의 마음도 지켜줄 수 있지 않겠는가? 그 시작이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