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칼럼 #1
이 글은 정치적인 글이면서도 정치에 대한 글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솔직히 나는 정치에 큰 관심이 없다. 그것이 언제나 나 스스로에 대한 불만 요소였다. 지금도 조금은. 하지만 "왜 정치를 알아야 하는가?"하는 질문에 답해주는 이는 없었다. 난무하는 것은 그저 서로에 대한 비방 혹은 뜬소문들, 그리고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나에게 날아오는 이따금의 핀잔들 뿐이었다. 핀잔을 주는 이들도 정작 왜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답해주지 못했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그 구름 위에 있는 정치라는 것과 지금 여기 발붙이고 있는 작은 일상들 사이의 괴리감을 느끼곤 한다. 그러다 어제, 4월 25일 JTBC에서 주관하는 대선 후보자 토론회를 보고 '오늘날, 한 나라를 대표하게 된다는 사람이 저래도 될까, '하는 생각이 정치에 대한 나의 '왜?'에 느낌적인 답을 조금은 주었다.
나는 주로 사람을 보았다. 그들이 말을 어떻게 하는지, 상대를 어떻게 대하는지, 기본 태도에서 어떤 게 드러나는지를 보았다.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이 구체적이라고 내놓는 정책들은 이상하게도 살에 와 닿지 않는다. 몇 조, 몇 억, 무슨 정책, 무슨 기술.. 그 무엇 하나도 오른 계란값만큼 다가오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홍준표가 "동성애가 군기강을 해쳐서 국방력을 약화시킨다."라고 말하자 문재인은 그에 동의하는 장면은 계란을 깨버리고 들어왔다. 그들은 너무 쉽게 공론의 장에서 동성애를 반대했다. '국방 안보 -> 동성애의 군기강 약화 -> 동성애 반대' 이해할 수 없는 논리구조로 자연스러운 흐름 인양, 홍준표는 그저 문재인이 동성애 반대한다는 말을 꺼내기 위해서만 질문했고 문재인은 그 말을 뱉었다. 그렇게 나는 너무나도 딱딱한, 차별하는 한 인간을 보았다.
도무지 그들이 '동성애'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군대에서 벌어진 동성 간의 성폭력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라면 그들은 애愛, 사랑과 성폭력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였다면 그들은 '모든 성폭력은 위험하다. 고로 군 안에서의 동성 간의 성폭력도 위험하고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라는 식의 논의를 했어야 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정말 동성애를 이야기한 것이라면, 그 동성 간의 사랑이 군기강을 해친다 주장이라면, 그렇게 그들이 '사랑'을 군 기강 해이의 요인으로 삼는다면, 여군과 남군 사이의 사랑도 똑같이 군기강을 해치는 것이다. 동성 간의 사랑과 이성 간의 사랑 중에 어느 하나만 특히 더 군 기강을 해칠 특이점은 못 찾겠기에. 그럼 이제 군인도 국방을 위해 사랑이 금지된 삶을 살아야 하는 건가? 이건 그냥 분에 차서 나오는 예시일지 모르겠으나, 고대 그리스 최강의 지상군으로 유명했던 스파르타만 해도 군 내에 동성애가 있었다. 물론 그들의 군은 규모가 크지 않았다는 조건의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그들의 동성애는 공동체 단결력을 더 끈끈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던가.
그러고 나서 심상정이 그런 문재인을 지적한다. 동성애는 찬성과 반대의 영역이 아니라 취향의 문제라며. 이전에도 심상정이 한 적 있는 발언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보고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말에 만족하는 것 같기에. 물론 찬반의 문제에서 취향의 문제로 사고를 진전시킨 것도 분명 의미가 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심상정은 "저는 이성애자지만,"이라고 말머리를 단다. 나는 이성애자지만 소수자의 권리를 존중할 것이다. 여기서 심상정도 결국 자신의 이분법*을 드러낸다. 이미 이런 동성애자/이성애자 이분법을 가지고 있다면 찬반의 문제로 보건 취향의 문제로 보건 끝내 소수자를 이해하진 못한다. 그냥 넓은 마음으로 받아주는 것, 이건 차별의 철폐가 아니라 은폐다.
오랫동안 여행을 하던 중 카우치서핑을 통해 영국에서 마흔이 넘은 게이(일단은 게이라 칭하겠다) 친구의 집에 머물게 된 적이 있었다. 처음 만난 그와 여러 대화를 나눴다. 그는 꽤나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지식 면에서나 지혜 면에서나 배울 점이 있었다. 그런 그와 대화를 하다가 나는 영국에서 게이로 살아가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How is it being gay, in Britain?"
그러자 그는 되물었다.
"What is 'being gay'?"
그 반문에 나는 아차 싶었다. 그때의 나도 Being gay와 Not gay, 즉 '게이다', '게이가 아니다'라는 이분법적 사고의 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친구는 얘기했다. 과연 우리는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로 그렇게 딱 나뉘어서 "나는 동성애자고 너는 이성애자다"라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그렇다. 우리는 흔히 그 둘 사이에 수직선을 그어서 나누고, 모든 생각을 출발한다. 그러나 사실 그 관계는 수평선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동성에 대한 사랑과 이성에 대한 사랑 사이의 수평선, 우리는 모두 그 사이 어딘가에 놓여있을 뿐인 것이다. 또 한 개인에 있어서도 그 수평선 위의 위치는 지금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 친구도 고등학교 때 동성에게 호감을 느꼈었지만, 대학 졸업 후에 만난 이성과 사랑에 빠져 6년간 결혼생활을 했었다. 지금은 이혼을 하고, 동성과 연애를 하고 있다. 이 한 인간의 개인사에서 마음이 오가는 과정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동성과 사랑해야 하는 것도, 이성과 사랑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 '해야 함'이라는 규정 지음만 버리면 되지 않을까. 우리는 '분명한 것'으로 규정짓기를 좋아한다. 한 남성이 다른 남성이 잘생겼다고 말하면 "너 게이야?"라고 물어버린다. 그 물음에 내재된 타자화의 폭력성을 보자는 것이다. 왜 그렇게 '-이다, 아니다'로 나누려고 하는가. 사람 마음이다. 짜장면 먹을까 짬뽕 먹을까도 갈팡질팡하는 게 그 마음이란 건데, 누군가를 사랑함에 있어서야 어찌 규정 지음이 가능하겠는가. 분명한 틀에 대한 자신의 욕구로 남을 가둬버리는 꼴이다.
어제의 토론에는 '이성애자들'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 이성애자가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존중한다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만족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동성애에 반대한다고 결의에 찬 표정으로 인정해버리는 것에야 어찌 비할 수 있으랴. 그러나 분명한 사고의 진전이, 역시 똑같은 출발점에 부딪혀버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구태여 "저는 이성애자지만, "이라고 말하고 출발했을 때, 심상정이 많은 소수자들을 저 멀리로 쭉 밀어 두고, '그러나 난 너희를 존중한다'라고 말하는 느낌이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성애자로서의 동성애자에 대한 존중이라기보다도, 사람으로서 사람에 대한 존중이 아닌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떠나, 그저 사람으로서.
마음속 딱딱한 수직선들만 눕히면 되지 않을까. 같이 부대끼며 사는 세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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