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거장 넷 - 객차
금요일 오후 정동진 해돋이 관광객들로 객차 안이 북적거린다.
초겨울의 스산함을 잊게 해주는 따스한 햇살이 원주와 동해 사이의 9개 정거장 간격을 잠시 좁혀준다. 제천 역을 지나고 낯익은 촛대 바위가 눈에 들어오자, 차창 밖에 머문 시선과는 달리 마음은 이미 동해를 향해 저만치 뛰쳐나간다. 텅 빈 가슴에 그리움이 차오른다. 잠시 동안 만이라도 모든 상념을 잊고 아내만 생각하고 싶다.
3등석을 벗어나려는 안간힘은 2년이 가깝도록 아무런 실효도 거두지 못하고 있다. 하루라도 빨리 1등석으로 옮기고 싶은 조급함, 매사 뜻대로 되지 않는 절망감, 이에 따른 패배감과 나 자신에 대한 분노가 문지방 턱만큼이나 낮은 인내의 벽을 넘어 서서히 번져 오르고 있다.
원주에선 평일 저녁마다 애꿎은 홍덕만 교수를 붙잡고 차오르는 좌절감을 술로 달랬다. 어제저녁도 예외는 아니었다. 현실에 쌓인 불만을 거침없이 토해내는 내게 홍 교수가 불쑥 물었다.
"네 말대로 전임 강사가 되고 유명 사진작가가 되면 지금 보다 훨씬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무슨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을 짓자, 홍 교수가 혀를 끌끌 차더니 말했다.
"너는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럼 제수씨는?"
그 말에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가 조용히 눈으로 묻고 있었다.
마치 나 자신도 잘 모르는 내 속을 다 들여다보고 있는 듯.
“넌 그 대답을 쉽게 할 수 없을 거야. 언제나 자기중심적이거든. 옛날부터 그랬고 결혼한 지금도 달라진 건 없어. 말로는 제수씨를 위해서 답답하다고 울분을 토하지만 넌 성공하지 못하는 네 생각만 하고 있는 거야.”
그가 천천히 입을 뗐다.
“한 번쯤 제수씨의 눈으로 너를 들여다봐."
냉정하고 예리한 그의 지적에 일순 찬물을 뒤집어쓴 듯 오싹해졌다.
온통 뒤죽박죽이다. 어디서부터 엉켜버렸는지 모르겠다. 즐겁고 행복해지기 위해 많은 돈을 벌고 성공하는 것이 생의 목표가 되었지만, 지금까지 즐겁고 행복한 사람은 결코 되지 못했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이룰 때까지 참아야 한다며 나 자신을 다독거려 왔다.
그렇지만 의문이 꼬리를 문다.
‘과연 목표에 다다르면 순식간에 행복해질 수 있을까?’
‘만의 하나 끝까지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면 영영 행복해지지 못하는 건가?’
‘목표에 빨리 다가가기 위해 다른 활로를 찾아야 하는 건 아닐까?’
여기에다 홍 교수의 질타는 훨씬 더 예리한 칼날이 되어 내 심장을 후벼 팠다. 내가 아닌 아내의 입장에서 나를 바라보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벌면 아내는 지금 보다 훨씬 더 행복할까?’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성공하고 돈 많은 남편을 통해 행복을 얻고자 했다면 굳이 먼길을 돌아 날 선택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처음부터 이미 성공과 돈이 보장된 의사 남편 후보 안모가 있지 않았던가?’
그걸 깨닫는 순간, 갑자기 후드득 찬 서리가 등골을 타고 쭈르륵 올라왔다.
'과연 아내는 지금 행복한가?'
그 질문에 얼굴을 파묻자 찌그러진 종이컵만큼 구겨진 자신감도 덩달아 자취를 감춰 버렸다.
이때였다.
"이봐요 젊은이, 겨울 햇살이 꽤 따갑지요?"
영월을 지났을 즈음일까? 맞은편에 앉은 노신사가 툭 하니 말을 걸어왔다. 원주에서 탄 나 보다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김밥과 삶은 달걀을 맛깔스럽게 먹고 있던 은발 신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