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여행 - 열일곱
일요일 아침 아내와 브런치를 먹으러 웰링턴 시내로 나갔다.
웰링턴 시내나 교외의 아담한 카페를 찾아다니며 브런치를 함께 먹는 건 아내와 내겐 정해진 주말 행사 중 하나다. 영화 ‘반지의 제왕’의 감독인 피터 잭슨의 집에서 멀지 않은 해변가의 유명한 카페 ‘초콜릿 피시’로 차를 달렸는데 공교롭게도 그날따라 문이 닫혀있었다. 이 초콜릿 카페에서 ‘반지의 제왕’ 영화화 논의가 잭슨과 뉴라인 시네마 관계자 사이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건 웰링턴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약간 김이 빠져 웰링턴의 해안가 부촌인 오리엔탈 베이를 따라 시내로 들어오다가 몇 군데 카페를 지나쳐 다운타운 중심가인 램턴 키까지 오게 됐다.
그날따라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거리는 한산했다. 우린 몹시 허기가 진 데다 비바람을 피할 요량으로 오랜만에 맥도널드 아침을 먹기로 했다. 시내 한가운데 위치한 50석 규모의 대형 맥도널드는 발 디딜 새 없이 만원이었다. 빈자리가 거의 보이질 않았다. 아내는 베이컨과 애그 머핀, 난 키위 브랙퍼스트와 커피를 받아 든 채 이쪽저쪽을 두리번거리다 안쪽 구석 깊숙이에서 빈자리를 발견하고 서둘러 자리를 잡았다. 음식을 놓고 먹기 전에 주위를 힐끗 둘러보니 내 뒤에 웬 노인이 앉아 있었다.
유독 그 주위가 비어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우선은 그 이상야릇한 냄새였다. 음식을 먹을 때 결코 맡고 싶지 않은 시시 퀴퀴한 그런 냄새, 아주 지독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심코 지나쳐 버릴 수도 없는 냄새였다. 그 노인을 보면 그 냄새가 왜 나는지도 알 수 있었다. 바지는 알록달록한 헝겊으로 온통 기워져 있었다. 시꺼먼 때까지 덮여 있지 않았지만 한 눈에도 누더기나 다름없었다. 윗도리는 쓸쓸한 늦가을이 끝나가는 계절 탓인지 보기 해도 답답할 만큼 네댓 벌을 껴입고 있었다. 집 없는 노인, 거리에서 생활하는 홈리스 (Homeless)로 보였다. 양순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또 한 가지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은 노인의 앞이마에 불쑥 튀어나온 작은 주먹만 한 혹이었다. 그 노인을 등지고 앉아 있자니 그다지 편치는 않았다. 아침식사를 하면서 늘 하듯 아내와 지난주에 있었던 일, 아이들 이야기, 회사에서의 일, 특히 얼마 전 다녀온 한국 출장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회사 출장으로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가 친구들과 만났다. 외국계 광고회사의 국장인 동생 왈, “서울에서 비즈니스로 사람 만날 때는 고급 옷을 입어야 돼. 유행 없는 뉴질랜드에서처럼 촌스럽게 입으면 절대 안 된다”며 내가 가져온 옷을 제쳐둔 채 자신의 양복과 와이셔츠를 꺼내다 열심히 코디해준다.
과거 서울의 직장 동료나 선배들과도 오랜만에 얼굴을 대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한결같이 나를 누구에게 소개할 때 예전의 나에 대해 먼저 설명하는 것이다. 나는 웰링턴의 마케팅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과거 한국에서의 직장에 비하면 아주 높은 지위라고 할 순 없다. 그러나 난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때가 되면 퇴근할 직장이 있어서 감사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갈 곳이 없었던 실업자 시절을 뼈저리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사하다. 게다가 세계 각지에서 온 다른 나라 직원들과 일하는 것도 즐겁다.
과거에 나를 알던 한국의 친구들이나 직장동료들의 눈엔 내가 초라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아니면 보잘것없는 내가 그들로선 부끄러웠는지 내가 서울에서 일간지 기자를 하다가 지금은 뉴질랜드로 이민 가서 살고 있다고 강조했다. 처음엔 무심코 넘겼는데 비슷한 상황이 매번 반복되면서 어렴풋이 그들의 심중을 헤아리게 됐다. 정반대로 내가 상황을 보고 있다면 아마도 그들이 놀랄 것이다.
서울에 오니 뉴질랜드에선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옷차림과 격식이 까다롭고 많은데 새삼 놀란다. 옷이 날개인 것은 틀림없겠으나, 겉치장으로 사람에 대한 대우의 급이 달라지니 우스운 노릇이다. 넥타이를 매는 정장 차림을 즐겨 입지 않지만 내가 만나는 친구들, 선배들, 친척과 가족들의 입장을 고려해서 넥타이도 매고 맵시 있는 양복을 입으려고 노력해본다.
내가 원하는 것을 고집하는 대신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에 맞추려고 애썼다. 이상한 것은 원래 마음에 들지 않는 색깔이나 모양의 옷을 입고 나서면 도무지 신이 나지 않았는데, 불편하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기 위해서 옷을 신경 써서 입자고 작정하고 입으면 기분이 훨씬 가볍다는 것이다.
‘내가 조금 양보하고 참지 뭐’ 하는 마음으로 차리고 나가면 불편하고 어색하지 않은 것이다.
한동안 아내와 서울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아내는 내 뒤에 앉아 있는 노인 때문에 영 집중이 안 되는 모양이다.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눈은 내 얼굴과 어깨너머를 오가느라 바쁘고 노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관찰하고 있다. 처음엔 낯선 걸인 노인네가 뒤에 앉아 있어 불편한가 싶었는데, “할아버지가 시장해 보인다”라고 안절부절이다. 뒤를 흘끔 보니 잡지에서 뜯은 종이 몇 장을 중얼중얼 읽고 있고, 냅킨이나 종이컵 없이 테이블 앞이 깨끗한 것으로 보아 무엇을 먹은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신경 쓰지 말자”며 내가 얘기를 이어갔다.
잠시 후 노인은 주머니에서 한 움큼의 동전을 꺼내 하나씩 하나씩 세고 있다. 금전이 하나도 보이지 않고 모두 작은 은전들인 것으로 미루어 5센트, 10센트짜리들이 태반이었고 많아봐야 2달러도 채 넘지 않을 것 같다. 아무리 맥도널드지만 그 돈으로 커피 한 잔이나 겨우 사 마실 수 있을까…. 아내는 이제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 나를 완전히 무시한 채 노인의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배고프신 모양이야…”
“남의 일에 공연히 끼어들지 말자.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불쌍하잖아. 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대화는 계속 끊기고, 무시하자는 나와 그래도 그냥 모른 척할 수는 없다는 아내와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우리 테이블 왼쪽으론 3대쯤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열명 가까운 대가족이 테이블 서너 개를 붙여 앉은 채 노인의 눈치를 보면서 말없이 아침을 먹고 있었고, 노인 옆 테이블엔 30대쯤 보이는 여자 서너 명이 한창 수다를 떨다가 가끔씩 뒤통수가 댕기는지 힐끔힐끔 노인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아내 옆쪽으로 10대 고등학교 남녀 학생 예닐곱이 모여 왁자지껄하다. 노인의 테이블이 코너 모서리의 공간에 자리 잡은 무대라면 우리는 무대 정면을 마주한 위치였고 우리 테이블을 중심으로 마치 관람석이 부채꼴로 넓게 뻗어나가듯 테이블 앞쪽으로 사람들이 꽉 차있었다.
노인이 은전을 손에 쥔 채 하나씩 세고 있다는 것을 주위 테이블에 앉은 우리 부부를 포함한 스무 명 넘는 사람들은 환히 알고 있었다. 동전을 세고 또 세는 노인을 바라보며 아내는 안타까움으로 발까지 동동 구르고 있다. 잠시 어쩔까 망설이다가 지갑을 열었다. 공교롭게도 그날따라 지갑은 텅 비어 있었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아무렇지 않게 아침식사를 끝내고 자리를 뜨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후회할 것 같았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일지도 모르는데 모른 체 무시하고 지나칠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발목이 묶였다.
두 번째 선택은 노인에게 돈을 건네주는 것이다. 그런데 노인이 어떻게 반응할는지 도무지 장담할 수 없었다. 어설픈 동정을 베풀었다가 ‘누구를 거지로 아느냐?’며 욕이나 삿대질로 나오면 뜻하지 않게 봉변을 당할 수도 있었다. 이마에 생긴 혹으로 보아 정신이 그리 온전치 않을 수도 있는데, 갑자기 전혀 예상치도 않은 반응으로 난처한 상황에 놓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상황판단을 잘못한 탓에’ 또는 ‘완전히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 여기 맥도널드에 앉아 있는 5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의 눈총과 지탄을 한꺼번에 받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찌해야 하나?' 잠시 막막했다. 아내에게 일단 남은 돈이 있느냐고 물었다. 노인의 아침을 해결할 수 있는 충분한 돈은 있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선택 사이에서 잠깐 고민했다.
‘도움이 필요할지 안 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냥 모른 체 무시한다?’
정답같이 보였지만 정답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내키지도 않았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면 줄 수 있는 도움을 주는 것이 설령 거절당하더라도 그 최소한의 시도는 해야 한다는 결정이 섰다. 아내에게서 건네받은 돈을 쥐고 노인 앞에 섰다. 주위의 시선이 일순 내게 쏠렸다.
개의치 않고 노인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괜찮으시면, 이걸로 아침식사 사서 드세요.”
노인이 내가 내민 10달러 지폐와 내 얼굴을 한동안 말없이 쳐다보았다.
잠시 후 “땡큐”라고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그가 돈을 받았다.
긴장이 일순간 풀어지면서 자리로 돌아와 남은 아침을 먹었다. 그 뻔한 맥도널드 아침이 꿀맛이었다.
맥도널드를 나오면서 작은 용기를 낼 수 있었던 나 자신에게, 무엇보다 그 용기를 갖도록 도와준 아내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왜냐하면 기분이 날아갈 듯 상쾌하고 좋았기 때문이다. 아내도 나를 쳐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2주일 뒤 그 노인의 죽음을 전하는 기사가 웰링턴의 조간신문인 도미니언 1면 하단에 실렸다. 사인은 동사였다. 초겨울날 아침, 시내의 뒷골목 담벼락에 엎어져 죽은 채 발견된 것이다. 직접적인 사인은 동사였지만, 이마에 자란 암덩어리로 인하여 의식불명이 되어 차가운 밤을 보내면서 얼어 죽었을 것이란 추측 기사가 실려있다.
그가 웰링턴에서 널리 알려진 기인이라는 것을 그날의 기사를 보고 처음 알았다. 누더기 몇 겹을 걸쳐 입은 그는 항상 손에 양동이를 들고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일명 ‘버킷 맨’ (양동이를 든 남자)로 웰링턴에선 유명했으며, 항간에는 그가 사실은 백만장자인데 일부러 걸인 행세를 하면서 산다느니 또는 숨은 예술 수집가이니 하는 온갖 소문들이 무성했다. 그를 모델로 해서 그려진 동명의 유화는 미술수집가들 사이에선 꽤나 값나가는 소장품이라며 그의 모습이 그려진 대형 유화가 신문에 사진으로 소개되었다.
그 양동이 든 노인을 잊을 수 없는 이유는 ‘타인을 배려하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생생하게 일깨워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나의 자존심 때문에, 또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또는 귀찮아서… 하는 따위의 주변적인 것들 때문에 선뜻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그들을 배려하는 걸 주저하게 될 때마다 난 항상 그 버킷 맨을 생각한다. 그때 주위의 시선들이 불편해서, 그가 하잘것없는 걸인이므로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해서 사랑을 베푸는 그 작은 행위를 포기했더라면 두고두고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의 돌연한 죽음을 접하고 몹시 후회했을 것이다. 불과 2주밖에 남지 않았을 그의 초라한 마지막, 비참한 죽음 직전에 맥도널드의 따뜻한 아침식사 한 끼라도 대접할 수 있었다는 나눔을 실천한 것에 작은 위안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깨달음은 배려란 결코 일시적인 감정이나 순간적인 느낌이 아니라 의지가 필요한 실천행위라는 것이다. 배려와 나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은 행위다. 자신을 낮추고 때로는 비워내는 지혜를 갖춰야 하고 그 지혜를 실천할 수 있는 의지, 즉 행동할 수 있는 용기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걸 배웠다. 여러 가지 주변적 상황 요인들에 의해서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