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거장 열다섯 - 내가 우리가 될 때
리시케시에서 맞은 첫 번째 주말 저녁, 우리 넷은 지난주 내내 들렀던 하이델베르크 대신 동네 인도 식당에서 토요일의 만찬을 함께 하기로 했다. 만찬이라는 용어가 어울리지 않을 만큼 허름한 곳이었지만 인도 한복판에서 맛보는 전통 인도 음식은 즐겨볼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케이시가 맞은편에 앉았다. 말없이 앉아 있는 케이시를 마주하자 어제저녁 일이 떠오르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마음속에 감춰 두었던 아픔을 드러냈다는 당혹감, 긴 세월 꿈쩍도 하지 않던 대못을 빼버렸다는 후련함, 그 비밀을 공유하게 된 친밀감, 40대 남자가 어린아이처럼 안긴 채 울음을 터뜨렸다는 부끄러움, 동시에 그녀가 보듬어준 따스한 손길과 향긋한 체취에 다시 흠뻑 빠져 보고 싶은 갈망 등 복잡한 감정이 마구 엇갈렸다.
가까스로 누르고 있던 긴장감과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마신 포도주가 식사 시작 전에 이미 한 병을 훌쩍 넘어버렸다. 소주 반 병도 견디지 못하는 내가 저녁 내내 리즈의 괄괄한 목소리를 거의 듣지 못했다고 깨달은 즈음, 평소완 달리 내가 횡설수설하고 있다는 사실이 흐트러진 퍼즐 조각처럼 드문드문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케이시가 가끔씩 얼굴을 붉히곤 하는 걸 의아해하면서 시계를 보았다. 불과 30분 정도가 흐른 듯한데 어느새 11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시간을 멈추게 해 달라고 소리쳤던 것 같다. 그리곤 그만이었다.
내가 무슨 소리를 지껄였는지, 주문한 생선 카레를 언제 말끔히 비웠는지, 어떻게 숙소로 돌아왔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형편없이 침대에 구겨진 채 잠들어 있다가 목이 꽉 막힌 듯하여 침상에서 일어나 앉았다. 아직 밤인지 새벽인지 시간도 흐리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구토가 몰려와 황급히 방바닥에 먹었던 것들을 모두 토해냈다. 비몽사몽간에 화장실도 네댓 번 다녀와야 했다. 눈이 자꾸 감겼다. 지끈거리는 두통이 밀물처럼 몰려와 머리를 짓눌렀고 목이 바싹 타 틀어 가는 것도 느껴졌다. 일어나 앉을 힘 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드러누우니 등줄기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거의 정신을 잃다시피 한 채 누워있는데 누군가의 손길이 이마에 느껴졌다. 덜거덕 거리며 바닥의 오물을 치우는 소리,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 사람들이 들락날락 거리는 소리가 한동안 꿈결처럼 이어졌다.
생선을 먹는 게 아니었다. 두통은 가셨지만 타는 듯한 갈증과 쇠진한 기력은 여전했다. 하루가 꼬박 지났다고 했다. 일요일 정오가 가깝도록 인기척이 없자 케이시가 내 숙소에 들러선 기겁했고 곧 리즈와 조앤이 달려왔다. 꼬마 바피까지 동원돼 바닥을 치웠는데 (그는 자기가 토하는 시늉까지 내면서 엄청 생색을 냈다) 케이시는 온종일 자리를 뜨지 않고 나를 간호했다고 바피가 나중에 말해주었다. 이틀이 지나서야 케이시가 만들어준 크림수프를 겨우 몇 수저 뜨기 시작했다.
“탈수가 심해서 계속 물을 마셔야 해요.”
일정 시간마다 물 컵에 빨대를 꽂아 내 입에 물려주었다. 간간히 눈을 뜨면 항상 그녀가 내 옆에 있었다. 침상 옆에 앉아 쉰내에 절은 나의 셔츠를 갈아 입혀주고 물수건으로 얼굴부터 오물과 땀이 범벅된 상반신을 닦아주었다. 조금 나아지는가 싶더니 월요일 오후부터 온 몸에 붉은 반점이 피어났다. 왼쪽 뺨이 붓는가 싶더니 참을 수 없이 가려워 마구 긁어댔더니 껍질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마치 바닷가에서 지독한 선탠을 하고 난 뒤 허물이 벗겨지는 것처럼 피부결이 벗겨져 나갔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그 반점이 어깨로 내려와 있었다. 목부터 양쪽 어깻죽지와 겨드랑이를 따라 크고 붉은 자국들이 부풀어 올라왔다. 붉은색 물감을 더덕더덕 칠해놓은 것처럼 흉물스러웠다. 케이시가 어깨의 반점들을 보더니 병원에 가자고 재촉했다. 웬만큼 감정 변화를 보이지 않는 그녀였지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의 굳은 표정에 나도 놀랐다. 제대로 먹지 못해 기력이 쇠잔한 몸을 겨우 일으켜 세우고 케이시의 부축을 받으며 가까스로 동네 보건소를 찾았다.
그런데 보건소는 휴무, 매주 화요일마다 쉰단다. 화도 나지 않았다. 지칠 대로 지치고 어지럼증에 돌아버릴 것 같았다. 케이시는 보건소 앞 그늘에 나를 앉히더니 어디론가 쏜살같이 사라졌다. 한참 뒤 땀이 범벅된 채 머리칼이 이마 위로 늘어 붙은 것도 모르는 케이시가 다시 나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인근 동네 의원을 알아봤다고 했다. 나 보다 더 아픈 것처럼 두 눈이 퀭한 늙은 의원이 맥을 짚어보고 혓바닥을 살피더니 어떻게 어디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알록달록한 알약들을 한 움큼 처방해주었다. 반나절 내내 아프고 쇠약한 몸을 질질 끌다시피 해 겨우 얻은 약이라고 일단 대 여섯 알을 입에 털어 넣었다. 어떻게 숙소로 되돌아왔는지 가물가물하다. 옆에서 나를 부축하느라 쌕쌕 대던 케이시의 숨소리만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그날 밤은 고열에 시달려 거의 잠을 못 잤다. 이러다가 인도에서 객사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만큼 겁이 덜컥 났다. 새벽녘에 케이시가 들러 완전히 퍼져 있는 날 보더니 해 뜨자마자 다른 의원을 데려 왔다. 하이델베르크 주인인 프란츠가 소개한 다른 동네에서 온 의원이라고 했다. 50대 후반쯤으로 점잖은 인상의 만프리트란 이름의 남자는 어제 다른 의원이 준 알록달록한 알약들은 절대 복용하지 말라고 당부하더니 오늘부터 하루 종일 물과 케차리 (죽)만 먹도록 했다. 식중독으로 인한 알레르기가 원인이라고 했다. 병의 원인을 알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게다가 코리엔더를 넣은 케차리를 아침 내내 먹으니 조금씩 원기가 살아 나는 듯 느껴졌다.
저녁때 다시 왕진 온 의사 만프리트가 내 어깨와 겨드랑이를 다시 살펴보더니 알레르기 반응이 심하면 사망할 수도 있는데 이제 고비는 넘긴 것 같다고 일러주었다. 그 말에 케이시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설사는 여전했지만 케차리와 크림수프를 번갈아 먹으니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만프리트가 설사가 멎으면 먹으라면서 환약을 처방해주고 갔다. 왕진 비용에다 약 처방까지 진료비를 케이시가 모두 지불했다는 걸 후에 전해 들었다. 꼬마 바피가 매일 들러 “이 사람 아직도 살아 있나’ 하는 표정으로 들락거리던 것이 어제저녁인지 오늘 아침이었는지 몽롱하다.
다시 하루가 지나니 그야말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허기에 잠을 깼다. 목요일 점심이 되어서야 비로소 포만감이 느껴질 만큼 감자 수프와 흰 빵으로 빈 속을 든든히 채웠다. 조앤이 프란츠에게 특별히 부탁해 가져온 음식이다. 수프를 두 그릇이나 다 비웠다. 배가 부르고 긴장이 풀린 탓일까. 그릇을 치우고 물 컵을 가져오는 등 부산스러운 움직이는 케이시의 모습이 흐릿하게 다가왔다가 멀어졌다. 다시 깊은 잠으로 빠져 들었다.
깨어보니 케이시가 침대 한쪽에 머리를 뉘인 채 잠들어 있다. 밖은 어슴프레 동이 트고 있었다. 이번 주 내내 밤새 뒤척거리는 나를 지켜보느라 꼬박 밤을 새운 게 어젯밤이 처음은 아닌 모양이다.
한참 동안 어둠 속에서 잠든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손을 뻗쳐 그녀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한 번 두 번 천천히 쓸어내리니 은은한 라벤더 향 내음이 났다. 그녀에게서 풍겨지는 비누향만으로도 다시 살아난 느낌이다. 내 손길을 느꼈는지 그녀가 선 잠에서 깼다.
“어때요, 수? 이제 괜찮아요?”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에게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주저 없이 내 손을 힘껏 잡았다. 그녀의 손을 꼭 쥔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떠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케이시, 당신이 내 옆에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가볍게 미소 짓더니 헝클어진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버스 안에서 처음 본 순간부터 당신 옆에 있고 싶었어요, 수.”
강가 위로 떠오른 일출 빛이 내 방을 칼날처럼 베어냈다.
2 주로 예정됐던 리시케시 체류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어제 새벽 이후 케이시를 만나지 못했다. 더구나 오늘의 이별에 대해선 어떤 구체적인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다. 현재 상태로는 꼼짝없이 리시케시에 남아 몸을 추스르는 것 밖에는 다른 선택에 내겐 없었다. 그렇다면 케이시와는 그냥 이렇게 지나치는 한 순간의 인연으로 끝나고 말 것인가? 혹시 이 실낱처럼 가는 인연을 이어갈 수 있을까? 턱밑까지 밀려든 답답함에 내심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리즈와 조앤이 작별인사를 하러 들렀다.
둘은 귀향이라는 또 다른 떠남에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리즈가 연락처를 주면서 샌프란시스코에 꼭 들르라고 신신당부를 했고, 조앤은 침상에 앉은 나를 꼭 안으며 “너를 그 버스 안에서 만났던 건 이번 인도 여행 중 최고의 행운이었다”며 “케이시를 잘 부탁한다”라고 말했다. 그 말에 내가 멍한 표정을 짓자, 리즈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깔깔거리던 두 사람이 사라진 잠시 후 케이시가 어제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크림수프와 흰 빵을 들고 나타났다.
“너는 오늘 안 떠나느냐”라고 조바심 난 내가 황급히 물었다.
대답 없이 수프를 내 앞에 놓고 뜨거운 수프를 한 수저 뜨고 호호 불던 케이시가 배시시 웃었다.
“나랑 바라나시 함께 안 갈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