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3월 상해에서의 일이다.
중국 출장은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재작년 북경, 선양, 대련, 내몽고의 후허하오터 등 북쪽을 돌다가 뉴질랜드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상해를 거쳤다. 상해엔 꼭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바로 임시정부 청사다. 당시엔 밤늦게 도착해 1박 후 바로 아침 비행기를 타야 했기에 들를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꼭 1년 후 상해를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상해 일정이 주말에 포함되었기에 '이번에는 꼭 가볼 수 있겠구나' 란 기대에 한껏 부풀었다. 그러나 2박 3일의 짧은 상해 일정은 주말까지 끼어든 각종 비즈니스 약속들 때문에 일요일 오후에 계획된 자유시간 마저 홀라당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나와 동행한 중국 협력사 펑 사장에게 짧게라도 그곳을 꼭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그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청사가 있는 곳으로 가려면 우리의 정상 일정에서 최소 1시간 이상 벗어나야 하고 월요일 교통 체증으로 미루어 2시간까지도 걸릴 수 있다고 했다. 설령 가더라도 다음 일정 때문에 그곳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불과 30분남짓이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주말 내내 빠듯한 추가 일정을 모두 소화했으니 잠깐이라도 꼭 가보고 싶다고 내가 재차 부탁했다. 우리를 안내하는 운전사에게 웃돈까지 건넸다.
가는 데만 2시간이 넘게 걸렸다. 차 안에서 펑 사장에게 상해 임시정부 청사가 갖는 의미에 대해 서툰 한자까지 써가며 설명했다. (구글 찾기로 내용을 번역을 해주고 이미지를 보여주면 이해가 훨씬 빠를 테지만 중국에선 구글과 페이스북 접속이 차단되어 있다)
우여곡절 끝에 상해 임시정부 청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네일숍 간판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로가 아닌 작은 골목길로 출구가 나와 있다. 그 허술하고 초라한 모습에 가슴이 철렁했다. 일제 강점기이긴 했지만 한 나라의 임시 정부나 되는 곳이 이렇게 보잘 곳 없다는 생각에 순간 망연자실했다.
넋 놓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10여분 남짓뿐이었다. 전체적으로 빨리 한 번 훑어봐야지 했지만 발걸음 하나하나가 쉬 떨어지지 않았다. 1919년 3.1 독립선언을 기초로 설립된 망명 정부이니 근 1백 년 전 나라 잃은 국민들의 정신적인 뿌리가 되었던 공간이 아닌가.
나는 무슨 열혈한 애국자가 아니다. 학창 시절 국어 선생님이 추천한 백범 일지를 처음 읽고 난 후 우리나라 근대사, 특히 일제시대부터 1940년대 전후 격동기 역사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있을 뿐이다. 외국에 오래 살면 자연스레 애국자가 된다는 말도 그리 틀리진 않을 것이다.
어느 틈에 펑 사장이 뒤를 따르며 내 일거수일투족을 카메라에 담아 주었다.
<부엌 한쪽에 식탁이 마련되어 있다. '만지지 말라'고 써 붙여 놓았지만 그들의 남은 손때라도 느껴보고자 식탁이며 의자며 작은 밥그릇 등을 연신 쓰다듬었다.>
<전시장으로 올라가는 목조 계단. 이것이 주 통로이며 성인 남자 한 명이 겨우 오르내릴 정도로 좁다>
<반대편 건물 모습. 세월에 지친 풍광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전시장으로 들어서니 빽빽한 각종 자료들과 사진이 사방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걸 보면서 '다음 일정은 제쳐야겠구나' 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마음만 급해서 마구 사진을 찍어 대는 바람에 나중에 보니 노출이며 초점이 모두 엉망이었다. 아래 사진 대부분은 펑 사장이 찍어 준 것이다. 그가 계속 사진은 자기가 찍을 테니 내겐 보고 싶은 자료들을 찬찬히 보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곤 고맙게도 '다음 일정은 아무래도 취소해야 할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
그 시대 사람은 아니지만 내겐 1920~40년대에 대한 '설명하기 힘든' 아련한 향수 같은 것이 있다. 아래 흑백 사진들을 하나씩 보면서 이 사진에 찍힌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당시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을 것인가를 짚어보니 가슴이 찡했다.
위의 사진은 1919년 10월 11일에 찍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기념사진이다. 앞줄 왼쪽이 해공 신익희 선생, 그 옆 가운데 앉은 이가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해공은 한국전쟁 후인 1956년 3대 대통령 선거 때 야당인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자유당 이승만 후보에 맞섰으나 선거 유세 중 열차에서 안타깝게 급사하고 말았다. 내가 본 해공의 사진은 모두 50년대 백발에 안경을 쓴 노구의 모습들 뿐이었는데, 교육자이자 독립 운동가로 활약하던 당시 25세의 그는 지금 봐도 여간 지적이고 멋스러운 게 아니었다.
가장 기대했고 보고 싶어 하던 사진이다. 양 손에 폭탄을 들고 태극기 앞에서 절명사를 가슴에 붙인 채 찍은 중앙 사진은 우리에게 친숙하다. 당시 윤봉길 의사의 나이 24세였다.
윤봉길 의사의 쾌거는 아직도 적잖은 중국인들이 기억하고 있다. 작년 서안에서였다. 예닐곱 명이 모인 중국인들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내게 난생처음 만난 중국인 사업가가 느닷없이 윤봉길 의사의 얘길 꺼내는 것이 아닌가. 내 나이 또래인 장지한이란 이름의 그와 밤새 독한 백주를 들이키며 중국과 한국의 근대사에 대해 얘길 나눴던 기억이 새롭다.
매헌 윤봉길 의사의 뜻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 서울 양재동에 있다. 1988년 건립되었으나 몇 년 전엔 전기요금 연체와 유지 보수비 부족으로 심각한 운영난을 겪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들렸다. 그러나 뜻있는 이들의 서명운동과 모금으로 목표했던 기부금이 매헌 기념사업회에 전달되었다고 하니 고마운 일이다. 매헌의 기념관은 상해에도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고 하니 다음 기회에 꼭 들러보고 싶다.
매헌 선생의 사진 옆에 낯익은 또 하나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사진은 아니었지만 매헌 선생의 의거에 몰두해 있다가 본 이봉창 의사의 모습은 다소 충격이었다. '한국 애국단 입단서'를 목에 걸고 태극기를 배경으로 양손에 폭탄을 든 채 활짝 웃고 있는 그 모습이라니.
이 사진을 찍은 것이 일본으로 건너가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기 22일 전, 그러니까 이미 죽음을 작정한 다음 찍은 사진이다. 거사를 앞둔 매헌 선생의 사진이 비장한 모습이라면 이봉창 의사는 맵시 입게 차려입은 검은 양복에 길게 째진 양쪽 눈, 기다란 얼굴에 고르지 않은 치열을 온통 다 드러낸 채 환하게 웃고 있다. 무슨 좋은 일을 앞두고 마냥 들떠 있는 듯 천진난만하기까지 한 그의 미소가 생경스럽다. 장난기마저 느껴졌다.
도대체 뭘까?
죽음을 앞두고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근원에는 과연 무엇이 자리하고 있을까? 죽음을 초월한 홀가분함인가, 아니면 죽음을 체념한 객기인가? 그 사진 옆엔 의거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된 후 쇠 투구 같은 것을 쓴 채 끌려가는 그의 모습이 찍혀 있다. 천황을 죽이려고 폭탄을 던졌다가 잡혔으니, 그것도 일본 심장부인 동경 경시청 앞에서 거사를 일으켰다가 현장에서 체포됐으니 그가 당한 모진 고문과 수모를 어디 가늠 키나 할 수 있을까.
그는 어떤 사람일까? 어떻게 자랐으며 어떤 계기로 대의를 위해 32세의 나이에 고귀한 생명을 던지게 된 걸까? 솟아나는 그러나 풀리지 않은 궁금증을 잔뜩 안은 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며 그땐 상해 임시 정부 청사를 그렇게 떠났다.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그 의문을 풀게 된 건 며칠 전 신문에 난 다음과 같은 기사 때문이었다.
- 일본인이 되고 싶었던 '꽃미남 모던보이' 이봉창 -
그의 일대기는 잘 짜인 한 편의 영화보다 훨씬 드라마틱했다. (다음은 이봉창-나무 위키와 책 '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에서 발췌, 단순 요약한 것임)
1900년 구한말의 암흑기에 태어난 이봉창은 어린 시절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으나 가세가 몰락하자 일본으로 건너갔다. 오사카 등지에서 철저한 황국 신민으로 살고자 이름도 '기노시타 쇼조'로 바꾸고 일본인 행세를 하며 일본인들, 특히 여자들과 많이 어울렸다. 부친을 닮아 호방한 성격에 가무에도 능해 여자와 술, 도박에 빠져 한동안 향락적인 생활을 했다.
그렇게 일본인이 되고자 했으나 오히려 조센징이란 멸시와 차별을 되받으면서 생각이 바뀌게 된다. 결정적인 사건은 당시 히로히토의 천황 즉위식을 구경차 보러 갔다가 단지 한글 편지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9일 동안 유치장에 구금된 것이었다. 누구보다 친일적이었던 식민지 조선의 청년은 터무니없는 차별들을 반복해 겪으면서 뼈저린 사고의 전환을 하게 된다. 그가 조선인이라는 자각을 되찾고 향한 곳은 상해였다.
환하게 미소 짓고 있는 위의 사진이 합성이라는 등 초기 친일 행적으로 미루어 그의 의거가 과대평가됐다는 등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일제에 의한 악의에 찬 조작일 가능성이 높다. 사실 그가 상해에 와서 특유의 친화력과 호탕함으로 일본인들과 많이 어울려 다녀 밀정이란 의심까지 받기도 했지만, 그의 진정한 의도는 백범 일지에 언급된 그의 토로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하이로 왔습니다."
비록 성능 불량의 폭탄으로 원하는 쾌거를 이뤄내지 못했지만 그 시대 한 청년이 살아온 과정의 족적을 따라가 보면 어느 독립운동가의 삶 못지않게 영웅적이다. 당시 그 누구도 감히 생각지 못했던, 조선을 강제로 삼켜버린 일본의 상징 - 천황을 폭살시키려 한 담대함, '영원한 쾌락을 얻으러 가는 길이니 기쁜 낯으로 사진을 박읍시다'라고 침울한 표정의 백범을 향해 웃었다는 그 호방함, 천성적인 활달함에 광폭의 인생 역정을 온몸으로 부딪혀 내며 배인 여유 - 마침내 그 환한 미소의 근원을 찾아내면서 그의 사진을 자꾸만 다시 보게 된다.
지금 입어도 어색하지 않은 검은색 모직 코트에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을 한 32세의 그가 환하게 웃고 서 있다. 친일 노동자에서 항일 운동가로 바뀌어진 한 풍운아의 역동적인 삶이 담겨 있다.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