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잃어버리다

정거장 스물둘 - 궤도 이탈

by 강바다

케이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단박에 내 품으로 뛰어든다. 열정적인 키스를 퍼붓더니 어쩔 줄 몰라하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잠시 후 언제 그랬느냐 싶게 예의 배시시 한 웃음을 띄우더니 고개를 수줍게 끄덕인다.

난생처음 하는 이 짜릿한 프러포즈의 순간을 지난 몇 주간 얼마나 많이 상상하며 즐거워했던가. 첫 결혼 때엔 청혼할 기회 조차 얻지 못했었다. 케이시의 반응은 위의 세 가지 전부 다 였으면 좋겠지만 적어도 이 중 하나일 것이다. 내가 아는 케이시라면 세 번째 가능성이 가장 높다. 배시시 웃으며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가장 그녀답다. 첫 번째 반응을 기대하지만 상관없다. 반지를 끼우고 길고 깊게 입을 맞춘 후 언제나처럼 그녀에게 ‘사랑해. 케이시’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늘 그렇듯 ‘몰랐어요, 수? 내가 조금 더 많이요’라고 말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가 아무런 말이 없다. 열정적인 키스도 배시시 한 미소도 없다. 말없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다. 기쁜 듯 슬픈 듯 묘한 표정이다. 그녀의 어깨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언의 대꾸가 숨 죽인 흐느낌으로 바뀌는 걸 어깨를 떨며 애써 참고 있다. 그제야 비로소 그녀가 내 청혼을 거절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뒷머리가 서늘해졌다.

‘그럴 리가.’

넋이 빠져 버린 것도 잠시, 낭패감이 엄습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워야 할 저녁이 다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으로 변해가고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 멍하니 그녀 앞에 서 있다. 수치심이 일었다. 화도 났다. 내 앞에서 흐느끼고 있는 그녀를 보니 내 기분과 감정을 앞세울 순 없었다. 그녀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안았다.

“난 괜찮아. 케이시. 내가 너무 앞서 나갔네. 미안해.”

그녀의 막혔던 울음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토닥이면서 무슨 생각을 해야 할는지 이제부터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는지 당혹스럽기만 했다. 마샬리스의 연주는 이미 끝난 지 오래다. 손가락만큼 짧아진 촛불과 지저분하게 엉켜 내려온 촛농들을 보니 마술같이 휘황찬란하던 식당이 어느새 눈 녹아 볼품 없어진 3월의 앙상한 숲만큼이나 스산하다. 부엌에서 엉거주춤하게 우리 눈치만 보고 있는 찰리도, 이 같은 상황에 대한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하지 않았던 나도 시선을 놓아둘 곳이 없다.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리던 그녀가 다소 진정된 듯 입을 뗐다.

“미안해요, 수. 오늘 밤은 혼자 있고 싶어요.”

그녀가 눈물을 닦으며 일어나선 휑 하니 사라졌다. 그녀를 막아서서 달랠 용기도 기분도 일지 않았다. 내 곁에 선 찰리도 이번만은‘노 프러브럼, 마이 프렌드’ 소릴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나도 식당을 나와 터덜터덜 밤거리를 무작정 걸었다.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날아갈 듯 기쁜 마음으로 돌아오리라고 생각했던 숙소로 가는 길이 아득히 멀기만 했다. 강가로 나와 빈 터에 앉았다. 이런 기분으론 도저히 케이시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청혼을 거절한 것에 대해 화를 낼 수 없었고, 프러포즈가 성공하지 못한 지금 그녀가 날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도 알고 싶지 않았다. 강가를 어기적 거리며 배회하다 다시 찰리스 키친으로 돌아왔다. 열쇠를 가지고 있어 다행이었다. 썰렁한 식당 안에서 남은 술을 찾아 마시기 시작했다.


창문을 타고 들어온 따가운 햇살에 눈을 떴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떴지만 숙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런 쓰린 심정으로 어떻게 케이시를 다시 본단 말인가. 해가 저물도록 거리를 배회했다. 석양이 내려앉아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깨끗하게 정돈된 방엔 케이시의 흔적이라곤 없었다. 테이블 위에 흰 종이가 눈에 띄었다.

‘아차’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케이시의 짐도 모두 사라지고 없다.


그녀가 홀연히 떠나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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