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컴한 동굴에서 헤매다

정거장 스물셋 - 검은 터널

by 강바다

그녀가 남긴 쪽지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제 떠날 때가 됐어요.

아무것도 묻지도 알려고도 하지 말아요. 부탁이에요.

당신과 함께 했던 지난 4개월, 축복이었어요. 그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싶으니 제발 날 찾지도 기다리지도 말아요.

안녕, 수

Kacy


황급하게 쓴 메모는 케이시가 썼으리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엉망이었다. 극심한 감정 상태에서 썼음이 틀림없었다. K자를 케이시 특유의 K로 흘려 쓰지 않았다면 쪽지의 진위마저 의심했을 것이다.

처음 삼 사일 동안 바라나시에서 케이시가 있을만한 곳을 다 뒤졌다. 케이시와 함께 다녔던 모든 장소를 서성거렸다. 무리를 이루고 있는 원숭이 녀석들을 멍하니 앉아 바라보기도 했다. 외로웠다. 아침부터 하루 대 여섯 번씩 찰리를 찾아가 케이시를 봤느냐고 묻는 것이 주된 일과였다. 그때마다 찰리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아무 말없이 고개를 쓰윽쓰윽 저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나를 떠나다니. 혹시나 마음이 진정된 그녀가 다시 돌아올까 계속 찾으며 기다렸다. 하지만 쪽지 내용대로 내게서 떠나려 했다면 바라나시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걸 결국엔 인정해야 했다.


일주일이 지났다. 델리에 있는 캐나다 대사관으로 찾아가 보기로 하고 짐을 꾸렸다. 대사관에서 내게 그녀의 신상정보를 건네 줄리 만무했지만 이대로 그녀가 돌아오기만 넋 놓고 기다릴 순 없었다. 그건 컴컴한 동굴 속에서 발목까지 차오른 물이 서서히 입과 코까지 덮어버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 이상의 고문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숨이 턱턱 막혀 왔다. 델리로 떠나는 날 아침 찰리를 찾아갔다. 혹시 케이시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지 모르니 내 연락처를 건네줄 수 있겠냐고 부탁했다. 찰리는 선뜻 응했다.

“노 프러브럼, 마이 프렌드, 노 프러브럼!”

그는 내가 처음 만났을 때의 낙천적이고 세상만사 걱정 없는 해피 찰리로 돌아가 있었다. 그럴 수 있는 그가 울음을 터뜨리고 싶을 만큼 부러웠다. 작별 인사로 그와 힘껏 포옹하면서 이제 나의 인도 여행이 끝났음을 알았다. 내 생의 한 페이지를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채워준 내 사랑을 만난 곳, 인도였다.




“서울로 돌아와선… 후후후 그저 창 밖으로 지나는 시간을 바라보며 흘려보냈습니다.”

움푹 들어간 표민수 회장의 눈자위가 유난히 검게 보였다. 검붉게 충혈된 그의 눈가에 회한이 가득했다.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맞기 직전에 허물어졌으니 의욕 상실에 무기력해져 버렸죠. 새로운 도약을 위해 머리를 정리하려 떠난 여행이었는데 오히려 파김치가 되어 나타난 저를 보곤 어머니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넉 달여 쯤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케이시 나름대로 불가피한 이유가 있었을 것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언제나처럼 저를 일으킬 사람은 저 자신밖엔 없었습니다. 가끔씩 답답하고 화가 치밀긴 했지만 언제까지 지난 과거에 얽매여 있을 순 없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쪽에 처박아 둔 인도에서 가져온 짐들을 정리하는데 이게 스르르 나온 겁니다.”

표회장이 손에 쥐고 있던 황갈색 수첩을 들어 보였다.

그가 건네 준 수첩을 열어보니 첫 장에는 케이시가 썼음직한 로드 맵의 차례가 적혀 있었다.

Chapter 1 죽음

Chapter 2 생의 의미

Chapter 3 행복

Chapter 4 사랑


불현듯 어떤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내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그가 나를 빤히 보더니 입을 뗐다.

“이 수첩을 받으면서 케이시와 나눴던 대화들이 생각났습니다.”

'죽음이 행복한 인생을 위한 로드 맵 1장이라니 아이로니 한데'라고 말했었다.

'죽음을 먼저 이해한다면 다가오는 생의 의미를 깨닫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된다는 얘기니까요.'
'생의 의미 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다가 갑작스레 다가온 죽음 앞에서 스러져버리고 싶지 않아.'

'우리 모두는 죽음을 잊고 살죠. 아니, 잊으려고 애쓰면서 살죠. 결국엔 죽음이 올 것이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저만치 멀리 있다고 편하게 망각해버려요. 하지만 가슴 한 구석에선 또렷이 기억하고 있죠. 죽음은 언제든 우리의 의사 따윈 상관없이 쉽게 다가올 수 있다는 걸. 그리고 생각보다 훨씬 빨리 온다는 걸.'
'왜 죽음이 내 로드 맵의 첫 장이어야 하는지 이제 알겠어.'

'왜죠?'

'죽음을 직시하면 삶이 보일 테니까.'

'바로 그거예요.'

케이시가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내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전에 잠깐만, 케이시. 당신은 로드 맵은 어쩌고 내 인생 지도를 위해 이 수첩을 건네주는 거지?'

'원래 나의 로드 맵으로 준비해둔 것인데 이젠 필요가 없게 됐어요. 그러니 수, 당신이 부담 없이 써줘요.'

'당신은 행복한 인생을 위한 로드 맵을 이미 완성했다는 얘기로 들리는데… 그렇다면 케이시, 로드 맵을 이미 완성한 선배로서 이제 막 로드 맵을 그리려는 이 풋내기의 길잡이가 되어 줘야 해.'

'기꺼이!'

그녀가 배시시 웃었었다.



남상무를 다시 만난 것은 그즈음이었다.

“내가 돌아왔다는 얘길 들었는지 남상무가 불쑥 연락해왔어요. 아버지의 기억을 되돌리고 싶지 않아서 처음엔 피하려고 했지만 어머니 말씀으론 내가 인도에 나가 있는 동안 나를 많이 찾았다고 하더군요. 어머니로부터 전해받은 주소를 들고 강원도 묵호로 갔습니다.”


남상무는 묵호 오양원에 누워 있었다.

30년 넘게 아버지의 최측근이면서 당당한 체구와 호탕한 성격으로 위세 등등하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윤기 흐르던 풍성한 백발은 짧게 잘라져 있고 바싹 말라버린 얼굴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못 알아볼 만큼 병색이 완연했다. 자신의 병든 모습 따윈 아랑곳없다는 듯 그는 나를 보자 안도한 모습으로 껄껄 웃었다. 그 웃음은 곧 고통스러운 기침으로 이어졌다. 그의 기침이 멈출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다.

“마침내 본부장님을 만났으니 이제 회장님을 뵈어도 꾸중 듣지 않게 됐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옛날 호칭으로 부르며 깍듯했다. 마치 신화그룹이 공중분해됐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듯, 아니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듯 거리낌 없었다. 거무스레 변한 손톱이 보기에도 섬뜩한 앙상한 손으로 침대 옆 서랍을 가리켰다. 서랍을 여니 누런 봉투가 나왔다. 그걸 가져가라고 내게 손짓하더니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등을 보인 채 돌아누웠다.
남상무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것이 분명히 마지막 만남이 틀림없을 진대 그는 퉁명스러운 손짓 몇 번으로 20년 넘은 우리의 인연을 마무리해 버렸다. 하지만 난 그럴 수가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아저씨의 한결같은 마음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했습니다.”

그의 등에 대고 이렇게 말한 다음 정중히 머리 숙여 인사했다. 내가 나올 때까지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서로가 마지막임을 잘 알고 있는 이런 작별인사는 처음이었고 너무 낯설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통스러웠다. 용기를 냈다.

“부디 평안히 가십시오, 아저씨.”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봉투를 열어 보았다. 파산 당시 채권단에 압수되지 않고 남은 무기명 채권이었다. 상당한 액수였다. 아까 나올 때 요양원 원장 수녀님이 해준 얘기가 비로소 이해됐다.

“처음에 이곳에 오셨을 땐 두 달을 채 못 견디실 것으로 예상했는데 6개월을 넘기셨어요. 입원하시자마자 거액의 재산을 저희 요양원에 전부 기부하셨습니다.”
채권이 어떻게 자기에게 남겨졌는지 그 돈으로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생각보다 한 가지 이미지가 머릿속에 들어선 채 사라지지 않았다.
그건 요양원에 들어선 다음부터였다. 배시시 웃고 있는 케이시의 모습이 생각난 것이다. 잊으려고 했고 서서히 잊어간다고 생각했던 케이시의 얼굴이 점점 또렷하게 다가왔다. 노란 원피스를 입고 수줍은 듯 웃는 케이시의 모습을 떨쳐버리려고 하면 할수록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갑자기 가슴이 터질 듯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아니 늦었더라도 상관없다.

무조건 케이시를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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