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거장에선 누구나 행복이라는 기차를 기다린다

기차 여행 - 여섯

by 강바다

심각한 자각 증상이 온 것은 그 해 새벽이었다.
거창하게 붙이자면 21세기가 열리는 첫 시각부터 아프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진=강바다>

매년 새해 첫날마다 나만의 의식을 치른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때부터였다. 12월 마지막 날의 자정이 가까워지면 한 모금에 훌쩍 비워버릴 만큼의 작은 잔에 포도주를 채워 밖으로 나간다. 고요한 하늘 위에 총총히 떠 있는 별밭에 한없이 감탄하면서 낯익은 별자리를 찾아본다. 어느 해엔가는 심하게 부는 밤바람에 밀려가는 회색 실밭구름을 쫓기도 했고, 다른 해엔 달마저 삼켜버린 어두운 하늘 아래 선 채 나만의 의식을 느긋하게 즐기곤 했다.

차근히 지난 한 해동안 일어났던 크고 작은 사건들과 잊지 못할 사람들을 되짚어 보는 한편, 새 날이 열린 새해에 성취해야 할 서너 가지의 목표를 새겨보면서 하늘을 향해 축배를 드는 것이다.

그 의식은 2년간 살았던 미국 오리건 주의 학교 기숙사에서 창 너머의 작은 오솔길을 내려다보면서, 캐나다 밴쿠버의 이모집에선 널따란 정원 너머의 숲을 바라보면서 매년 계속되다가 만사가 바쁜 서울에 돌아와선 숨 막힐 듯 앞뒤로 늘어선 콘크리트 건물에 마음마저 짓눌려 슬그머니 잃어버리고 말았다.

‘자연 속에서 누리는 혼자만의 사색’이란 의미마저 상실하여 서울생활 4년 동안은 그 의식조차 접어버렸다.
‘새해를 향한 축배’라는 의식을 다시 시작한 것은 뉴질랜드로 이민 온 첫 해, 오클랜드의 손바닥만 한 정원에서였다. 울타리 옆에서 자라는 키 작은 레몬나무를 만지작거리고 정원 여기저기서 우는 풀벌레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뉴질랜드에서의 새 인생을 설계했다.

2년을 살던 오클랜드를 떠나 새롭게 자리 잡은 웰링턴에서도 신년 의식은 계속되었다. 장소와 풍광, 상황은 적지 않게 차이가 났지만 후회이든 회한이든 지나가는 해는 언제나 아쉬움이 남았고, 다가오는 새해엔 막연하지만 희망을 기원했다. 20세기를 보내는 12월 31일의 의식은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실패의 늪에 허우적거린 지난 몇 해였지만 이 해가 그 끝이자 절망 탈출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희망에 마음도 가벼워지고 들뜨기까지 했다. 올해는 '시행착오와 실패'란 오물투성이의 낡은 기차에서 내려 ‘화려한 행복'이란 이름의 새 기차로 갈아타는 정거장이 될 것이라 몇 번이나 되뇌며 하늘을 향해 멋진 축배를 들고 잠자리에 들었다.

불과 2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잠이 깨었다.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마침 오클랜드에서 이곳 웰링턴까지 일부러 찾아온 반가운 손님들과의 점심, 저녁 약속들을 잇달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뉴질랜드 1월은 전해 크리스마스를 시작으로 연말연시의 들뜬 분위기까지 겹치는 1년 중 최대의 휴가기간이다. 학교는 여름방학이고, 직장인들은 1년 동안 다 못쓴 휴가들을 붙여 쓰느라 최소 2주 길게는 4주씩 휴무한다. 게다가 일 년 중 해가 가장 길어지면서 저녁 9시까지 날이 훤하다 보니, 너도 나도 해변으로 나가 하루 종일 일광욕을 하거나 바비큐 파티로 늘어지게 나른한 휴식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때이다.

크리스마스 즈음에 피는 붉은 꽃 때문에 크리스마스트리라고 불리는 포후투카와 (Pohutukawa) 나무다 <사진=강바다>

웰링턴은 다운타운 시내 어디서나 3 km 이내에 바다가 있는 아름다운 항구도시다. 해변에서 또는 집에서 삼삼오오 가족과 그동안 자주 못 만난 친구들이 함께 모여 시원한 맥주나 와인을 곁들여 바비큐로 고기 구워 먹는 것이 하나의 생활문화로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밖은 포토샵으로 칠해놓은 것처럼 푸른 하늘에 녹색의 숲들이 하늘거리는 그림 같은 여름날이건만, 난 커튼 드리운 어두운 방에 누운 채 며칠간 비몽사몽이었다. 피곤이 쌓인 것이니 조금 쉬면 괜찮겠지… 하던 것이 5일째가 지나도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응급실로 실려갔다. 그리고 바로 입원했다.

<사진=강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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