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이태리에 가고 싶다

기차 여행 - 일곱

by 강바다

입원기간 동안 각종 피검사를 시작으로 초음파 검사를 받았다.
추가의 정밀검사가 요구된다고 해서 일단 4일 만에 퇴원했다. 집에서 요양하면서 병원에서 준비해주는 여러 단계의 정밀검사를 거쳐야 했다. 대기 환자의 수에 따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CT, 내시경 등을 차례로 거쳤다. CT 검사를 하는 날, 몸을 고정시킨 채 원통 모양의 CT 스캐너로 들어가는데 스캔 전 채혈을 했다. 주삿바늘이 들어간 핏줄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도대체 멈추질 않았다. 한참 동안이나 힘주고 누르고 있으니 겨우 멈췄다. CT실 바닥이 내 피로 흥건히 얼룩졌다.

내시경도 처음이었다. 24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약속된 내시경 검사를 받으러 갔다. 내시경을 하기 전 국부 마취를 하겠느냐 아니면 마취 없이 그냥 하겠느냐고 묻길래, 얼떨결에 “마취를 하는 게 낫겠다”라고 대답했다. 마취 없이 내시경을 받았던 옛날 직장의 한 여기자가 그 의학적 경험을 마치 ‘검사대 위에서 한 마리 동물이 된 끔찍한 느낌이었다’고 한 표현이 불현듯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마취 덕분에 내시경 검사에 대한 아무런 기억이 없다. 검사가 어떻게 끝났는지 모르겠지만 나보고 절대로 운전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간호사의 말은 어렴풋이 기억난다.

검사를 마치고 나면 그 결과는 우편으로 통지해주었다. 기다리는 것은 딱 질색인데, 그런 중요한 결과를 막연하게 기다리려니 차라리 잊어버리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시시각각 몸은 천근만근인데 그걸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불안감으로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게 1월이 다 지나고 2월 중순이 가까워져서야 병원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1주일 뒤 다시 약속이 잡혀 있었다. 전전긍긍하며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보통 아픈 것이 아닌 게 확실했다. 문제는 아픈 상태의 정도가 어느 정도냐 하는 것이었다. 매일매일 마음을 굳게 먹으려고 애써 보았으나, 가슴 한 구석에서 피어나는 ‘혹시나 별 것 아닌 것으로 과민하게 걱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막연한 기대로부터 위안을 찾고 있는 나 자신에 그저 놀랄 뿐이었다. 눈을 뜬 아침이면 침대에 누워 몇 번씩 최악의 상황과 최선의 기대 사이를 저울질하듯 왔다 갔다 하면서 긍정적인 기대 속에 나 자신을 몰아넣었다. 그런 저울질에 지쳐버릴 즈음 약속한 날짜가 다가왔다.

병원 대기실은 10여 명이 넘는 환자와 그 보호자들로 번잡했다. 대기실 벽에는 각종 질병들에 관한 팸플릿들이 꽂혀 있고, 한쪽 켠에 철 지난 여성 잡지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뒤적거리던 여성잡지 표지에 이태리 여행 특집기사가 눈에 띄었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한다는 남부 이태리의 아말피 해변, 폼페이 유적을 볼 수 있다는 베수 비어스 산, 거대한 회색 지붕을 가진 중세의 성곽들, 엔리코 카루소의 사진 그리고 카프리섬으로 가는 배편 정보가 관광객들의 사진과 함께 나와 있었다.

“이태리 엘 꼭 가고 싶다!”

잠시 후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심판이 내려질 수도 있는데 갑자기 이태리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이때 의사가 나를 찾았다. 의사를 마주하고 앉으니 이제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는 피고처럼 긴장할 대로 긴장해 숨 쉬는 것조차 거북해 미칠 지경이었다. 머리털이 쭈뼛 서버리는 이런 결정적인 순간이 인생에 과연 몇 번이나 있을까.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부터 ‘별 것 아닙니다. 잘 먹고 충분히 휴식을 취하면 시간은 다소 걸리겠지만 괜찮아질 겁니다’까지 모든 상황이 현실적으로 가능해 보였다.
심판은 의외로 짧고 간략했다.


“이대로 두면 1년을 넘기지 못할 겁니다!”


설마 하면서 최악의 상황도 고려했지만 막상 최악의 상황이 되어버리자 귀가 먹먹하고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전혀 실감 나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할 뿐이었다. 우습게도 ‘이제 이태리는 갈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올 크리스마스가 마지막이 되겠구나.. 과연 크리스마스 때까지 살아 있을 순 있을까..'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고 있는데 젊은 의사가 방으로 들어왔다. 미국에서 단기 인턴과정을 밟기 위해 온 의대생이란다. 그가 “진료해도 괜찮겠냐?”라고 묻길래, 내가 “상관없다”라고 대답했다. 그냥 지금 이 상황이 빨리 지나가버렸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이곳저곳 내 몸을 눌러보는 그에게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미국 어느 대학에서 왔느냐?”

그가 “조지타운 의대에서 왔다”라고 대답했다. 조지타운!
아내와 신혼생활을 시작한 미국 유학시절, 워싱턴 D.C. 와 버지니아주 일대를 여행하다가 조지타운 대학을 들른 적이 있다. 대학가 근처 이태리 식당에서 아내와 피자를 먹었었다. 10여 년 전 행복하던 그때가 생생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여름날 오후의 정겨운 거리 풍경, 나무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작은 쇼핑몰 모퉁이의 야외 카페,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청동상 옆에 나란히 앉아 사진을 찍었던 일, 그 맞은편 이태리 식당의 분위기, 소박한 나무 테이블, 심지어 얇은 피자 모양까지 생각났다. 안초비 때문에 피자 맛은 굉장히 짰었다.

불현듯 꼭 살고 싶어 졌다.
떠나가 버리기엔 세상이 너무 아름답다. 죽는다는 것이 무섭다기보다 너무 기가 막혀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길어봤자 1년! 그 안에 나의 생명이 사라진다”는 몸서리쳐지는 얘기를 내 귀로 직접 듣고 보니, 반사적으로 살고 싶다는 본능뿐이었다.

생의 끄트머리에 선 그 순간, 순백의 질려버릴 듯한 공포 그 자체였다. <사진=강바다>

이때만큼 생의 끄트머리에 서있던 순간은 없었다.
이 지점을 언젠가는 넘어가야 하겠지만 지금은 결코 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너무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이란 죽음의 실체는 내 준비 여부와는 상관없이 성큼 내 옆에 다가와 서 있다. 닿으면 무엇이든 쩡쩡 얼려 버릴 것 같은 찬 입김을 쉬이익 쉬이익 내뿜으면서 내 옷소매를 잡아당기고 있다.
‘자. 떠날 때야. 어서 가자’고 나를 재촉하면서.

그 순간은 철저하게 나 혼자였다. 내 영혼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아내조차도 이 공포와 혼란, 두려움이 혼재하는 감정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내뿐 아니라 그 지점을 넘지 않은 누구도 그 순백의 질려버릴 듯한 공포 그 자체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예기치 않았던 정거장 – 바로 내가 내려야 할 종착역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 생일을 며칠 앞둔 2월의 아름다운 여름날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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