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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董

by Andrew Oh


하야시 다다스(林董, はやし ただす, 1850 ~ 1913) — 일본의 외교관이자 정치가로,

삼국간섭 당시 외무차관, 이후 대한제국주재 일본공사, 그리고 외무대신을 역임한 인물입니다.


그는 메이지 일본의 대외 팽창정책을 실무적으로 이끈 핵심 외교관이었습니다.


#林董



기본 정보


항목 내용

이름 하야시 다다스 (林董, Hayashi Tadasu)

생몰연도 1850년 ~ 1913년

출신 일본 조슈번(長州藩, 현재의 야마구치현)

학력 영국 유학 – 런던 대학 유학 후 외무성 입부

주요 직책 외무차관 주조선공사 주영국공사 외무대신 (1906 ~ 1908)



삼국간섭 당시 (1895년) 역할

1895년,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陸奥宗光)의 아래에서 외무차관으로 재직.


시모노세키조약 체결 이후,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삼국간섭 요구문을 직접 처리.


일본 정부 내부에서 굴욕적 철회 수용을 조율하며 외교 문안을 기초한 실무 책임자.


무쓰가 병으로 쓰러진 후, 사실상 외무성의 대행 역할을 수행.


그는 “국력이 미약하면 정의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후 일본 외교의 ‘실력 중심주의’ 노선을 강화하는 기반을 닦음.


대한제국 관련 경력

• 1896년~1897년: 주조선 일본공사로 부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1896) 시기 주한공사.

한국 내 정세를 보고하며 “조선은 일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본국에 보고.


이후 일본 정부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 회복을 위해 경제·군사 개입을 가속화함.



주영국공사 및 영일동맹 체결

1899년~1906년: 주영국공사로 근무.

1902년, 영국 외무장관 랜즈다운(Lansdowne)과 함께 영일동맹(Anglo-Japanese Alliance) 조인.

이 조약이 훗날 러일전쟁의 외교적 안전판이 됨.


그 공로로 귀족(자작, baron) 작위 수여.


#Anglo_Japanese_Alliance


이후 경력

1906~1908년: 제1차 사이온지 내각에서 외무대신.

포츠머스조약 이후 대러 관계 정상화, 조선 병합 정책 외교적 조율.

1913년 사망, 일본 외교의 “서구화된 관료주의 전통”을 세운 인물로 평가됨.



요약


하야시 다다스는 삼국간섭의 굴욕을 몸소 경험한 외무차관이자,

10년 뒤 영일동맹을 성사시켜 그 복수를 완성한 외교관이다.

메이지 외교의 실무 설계자, 조선 병합 외교의 밑그림을 그린 인물로 기록된다.


삼국간섭 영일동맹 한일병합으로 이어지는 정책 연속성 도표를 시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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