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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w Park Apr 23. 2023

고만큼 모자랐던 것이다

저에게는 제 마음의 상태를 가늠하는 지표들이 여럿 있습니다. 예를 들면 책을 보는 거요. 마음이 정돈되었을 때는 제법 집중해서 읽어지지만, 마음이 곤죽일 때는 같은 문장을 여러 번 되돌려 읽어도 당체 머릿속으로 들어와 지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돈을 쓰는 것입니다. 마음이 채워져 있을 땐 누군가에게 밥을 사주고 선물을 사줘도 마음이 든든하고 잘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마음이 바닥났을 땐 한 푼도 아까운 마음이 듭니다. 말 그대로 속이 좁아지는 겁니다.


요즘 들어 내 마음의 바닥이 만져지는 감각이 느껴졌습니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아쉬운 마음이 커져가고, 불평이 늘고, 고마운 부분들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작년 요맘때에도 했던 고민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 마음의 상태가 좋을 때에는 잠잠하다가, 몸이 바빠지고 생각이 게을러지면 여지없이 찾아오는 생각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의 행적을 배우고 익혀, 같은 삶을 따라서 살겠다고 결정했습니다. 그의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절기인 사순절 동안 그의 최후의 순간에 대해 고민해 보았습니다. 인간을 만든 창조주가 인간의 손에 못 박혀 죽어야 했던 그 순간을.


역설입니다. 죽음으로서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을 증명했던 것이고, 바로 그 사랑으로 인해 죽임 당한 것입니다. 20세기 영국의 가톨릭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허버트 맥케이브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씁니다.

내가 여러 번 말했듯이 복음은 두 개의 상반된 진리를 역설하는데, 이는 인간 조건의 비극을 드러낸다. 그 하나는 만약 당신이 사랑하지 않는다면 죽을 것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이 정녕 사랑한다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것이다. 당신이 사랑할 수 없다면, 자기 폐쇄적이고 열매를 맺지 못하며 당신 자신이나 다른 이들을 위한 미래를 창조할 수 없고, 결국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당신이 정녕 실제적으로 사랑한다면, 우리 사회가 의지하는 지배 체제에 위협이 될 것이고, 살해당할 것이다. 예수의 삶과 죽음이 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허버트 맥케이브, <신은 중요하다 "God matters"> 중

내가 따르는 예수의 방식을 저도 닮고 싶습니다. ’사랑하려면 죽어야 하고, 죽어야 사랑한다‘로 귀결되는 무결하고 오롯한 형태의 사랑. 줄 수 있는 것들 중 어느 것 하나 조금도 봉창질 하지 않고 모조리 내어주는 아낌과, 끝도 없이 낮은 곳으로 향한 겸손의 포화점. ‘사랑할 수 없다면 … 살아갈 수 없다’고 썼던 저자의 말처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삶의 저자의 집필 의도에 반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뒤통수에 양각되어 있는 원산지 표기 “Made in Love”를 매만지며 다시금 다짐합니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강렬한 감정만이 아니다. 그것은 결의이고 판단이고 약속이다"라고 적었습니다. 그의 말마따나 사랑은 수동적으로 "하게 되는 것"보다는 능동적으로 "하는 것"의 의미가 더 큰 것 같습니다. 뜻을 모으고, 품을 들여서야지만 이행할 수 있는 것이요. 고든&게일 맥도널드 부부도 사랑에 대해 이렇게 덧붙입니다 "사랑이란 한 사람과 관계를 선택한 다음, 그 관계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요구되는 모든 대가를 지불하는 것".


사랑할만한 것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예수가 했고, 제가 해야 할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할만하지 않은 것, 사랑받지 못할 것들마저도 마음에 품는 것이 지고한 의미에서의 사랑이라고 믿습니다. 내 생각, 내 기준대로 판단하는 한 결단코 이뤄내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의식적으로 내 마음과 씨름하며, 예수의 방식과 기준을 선택할 때에야 비로소 얼핏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제 마음속 최고의 상남자 조르바 행님의 어록입니다.

두목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려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바보, 아시겠어요? 모든 걸 도박에다 걸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좋은 머리가 있으니깐 잘은 해나가겠지요.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깐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 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두니까 이러지 줄을 자를 수 없지요. 아니 아니야 더 붙잡아 맬 뿐이지. 이 잡것이 줄을 놓쳐버리면 머리라는 이 병신은 그만 허둥지둥합니다. 그러면 끝나는 거지. 그러나 인간이 이 줄을 자르지 않을 바에야 살맛이 뭐 나겠어요? 노란 카밀레 맛이지 멀건 카밀레 차 말이오. 럼주 같은 맛이 아니오. 잘라야 인생을 제대로 보게 되는데...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중

눈 딱 감고 결정하면 될 일이지만, 원체 마음이 미숙하여 번번이 망설여집니다. 자꾸만 계산하게 되고, 재어보게 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0과 1처럼 "함"과 "하지 않음" 둘 중의 하나일 테고, 사이에 어중간한 것은 없습니다. 인생을 제대로 맛보기 위해선 상남자처럼 뒤도 안 보고 가진걸 다 내어주며 사랑해야 하건만, 도대체 언제쯤이면 하남자를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이제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내가 아는 한 가장 좋은 방식의 사랑을 배웠고, 이제 그 사랑을 제가 해보려 합니다.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지는 분명합니다. 또한 무슨 대가를 지불해야 그 관계의 목표를 이루게 되는지도요. 사실 자신은 없지만, 적어도 어떠한 논리의 등가교환이 이루어지는지는 확신합니다. 내가 죽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요.




최근에 책을 읽다가 맞닥트린 짧은 시가 하나 있습니다. 마음에 걸어 놓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나 죽도록
너를 사랑했건만,
죽지 않았네

내 사랑 고만큼
모자랐던 것이다


박철, <사랑> 전문


고만큼이라고 했지만, 그 고만큼이 한참 멀기만 한 듯하여 망연해집니다. "나"와 "죽도록 사랑함" 사이의 그 간극이 가늠조차 안될 만큼 아득하고 망망해서, 아무리 해도 부족하고 도저히 닿을 수 없을 것 같아 지레 무력해집니다. 커다란 산 아래에서 꼭대기를 바라보는 것처럼 시작도 하기 전에 맥이 탁 풀려버리는 듯한 허탈감입니다. 바닥을 딛고 선 발가락 끝에서부터 힘이 빠져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닌, 해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있게 됨의 영역이라 믿습니다.


오래된 시의 한 구절이 제 마음을 잡아 끕니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반칠환,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중




참조: Herbert McCabe, <God matters: Contemporary Christian Insights>. 고든&게일 맥도날드, <마음과 마음이 이어질 때>. 박철, <작은 산> (실천문학사, 2013). 반칠환,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시와시학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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