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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w Yoon Sep 04. 2016

뉴질랜드..  My country   

해외생활  체험수기 - 1  


오래전 이야기이다.  벌써  24년 전.  

1992 년   8월.


   


  

한국을  떠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   

뉴질랜드  이민 문호 개방이라는  신문기사에  눈이 갔고  

아무   망설임 없이   몇주 후에  모든 구비서류를  완벽하게  준비하고   

이민신청서를   서울 뉴질랜드 대사관에 직접  접수했다.    


당시  뉴질랜드가   젊은  인재를  찾습니다..라는  말을   

나는   건방지게도    

“ 나를  찾는구나..라고    해석했었다.  


뉴질랜드는  왜  젊은  사람에게   이민 문호를 개방한 것일까.    

24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간단히  답은  나온다.  




이곳  젊은 층이   더 큰 나라를 선호하여   대부분  호주를 비롯한  해외로 자꾸  떠남에 따라   

인구 구성비가  점점  노년화 되어갔고   이에 따라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자꾸 줄어드니   

당연히  세금 수입원도  줄어들고   반면   노인 복지지출에 대한   부담이 크게  되고. 


해외로부터  젊은 인재? ,  최소 4년제 대학교를 졸업한 학사학위 이상 소지자로서   

어느 정도  경력을 보유하고  젊은 나이 가   이민을 오게 되면은    

뉴질랜드에서  일자리를  찾거나   혹은 자영업을  시작할  확률이  아주  높다고   

단순 추측해서  어느 정도는  세금 확보를  기대한 듯.    


어쨌건  그건  당시  뉴질랜드  정부의  일방적인  판단.  



 

                                               크라이스트처치 , Christchurch   현재  우리집  근처 공원에서.  





나의  이민 신청서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신청 접수 후  몇 주도 안되어서  

영어 인터뷰를 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서울 종로에 소재한  뉴질랜드 대사관에서  영어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라는 자체 하나만으로  사람 긴장하게 하지만  거기다  영어로 진행한다는  점에서  

나는  매우 심각한 걱정을  하기 시작했고   속까지 불편해서  식사까지  잘못하게 되겠도  

이 영어 인터뷰 날자가  잡히고 나서부터  이었다.


종로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서  교보빌딩에 도착하여  두근두근 긴장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커피숍에서   아이스커피를  억지로  마셨고.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17층인가 까지 올라가면서도   

마음을  여유롭게  가져보려고  온갖  노력해보고  마음을  다지고 또 다져봤다.    




맘 좋보이는   영사? 여자분.    

이분은   내가 처음 만나 본 뉴질랜드 사람이었다.  

간단히  나의   이름을 물어보고 나서는  

뉴질랜드 초등학교의  영어책을  갑자기  가져와서   읽어보라고 했다.

그리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는데    아마도 초등학교 2~ 3학년의 책인 듯.


나의  영어능력, 듣기,   읽기,   말하기 능력  등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보려는 것 같았는데   

다행히도  내가  제일 두려워하고 걱정했던   영어 쓰기 능력  테스트는  없었다.

영어로  듣고 ,  읽고,   말을 할 줄 알면   뉴질랜드에서   초기  정착하기가   쉽다는 뜻이었을까. 


여전히  긴장하면서  다음  질문을 기다리는데,    

드디어  다음  질문이 왔다.   

“  만약  뉴질랜드에 가게 되면   어떻게 , 어떤방법로  뉴질랜드에 어떤  도움을 줄 것인가?  “  


이 질문은   미리 예상했던 터라서   외운 대로   쉽게  나 의 대답이 나왔다. 


“   나는 3개 국어가  가능하다.    한국어 , 일본어 ,  영어   나의  세 가지 언어 기술을   가진  사람은 

뉴질랜드에서   반드시   필요할 것이므로   나는   일자리를  구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하루빨리  일자리를  찾아서  뉴질랜드에  공헌도 하고   나의  이  세 가지 기술로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다. “ 


당시  나의  영어실력은 정말  엉터리  그대로 이었겠지만    

이 말은   24년이 지난  지금 다시  생각해도   참  멋진 말이다. 




                                         카이코라  , Kaikoura   가는 기차안에서 -  1





일주일도 채 안되어서   나  와  와이프 ,  6개월짜리 딸   모두   영주권 승인 레터를 받았다.    

그날은   1992년  11월 3일이다.   

뉴질랜드 정부로부터   “인재”?   로서   공식 인정 받은 셈.  



그  여자 영사분이   나의  그  멋진 말에   잠깐  현혹이 됐었는지   아님    나는  정말  운이 좋은 것.   



                                                        카이코라 Kaikoura 가는 기차안에서  -2  






24년이 지난    지금 현재  이  영어 인터뷰는   IELTS라는 객관적인  영어능력  평가 시험평가제도로   

변경되었고 ,  뉴질랜드로  이민을  오려면  이  영어시험을  꽤나 높은 점수로서   반드시  통과하도록  

이민법은  변경되었다. 

해서  영어를  이상?  하게  배우고 있는   한국사회에서는   도저히  이 점수를  딸 수 없고 

따라서  이때부터  한국으로 부터의  이민자는  거의   ZERO  수준으로  급감하게 된다. 


이민법이   이렇게  변경되어   한국에서   후발 주자들이   못 오게 된  상황에  대해서는   

나를  포함한   초창기 한국인  이민선 배자들에게  분명히  책임이  있다.  


어떤 책임이  왜  있을까.     

나의  이  생각은  틀릴 수도  있다.   아니  내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  




                                                        카이코라  Kaikoura  해변가에서 - 1 





그리고   이민 신청자의  잠재력, 능력을 보지 않고   오로지  그 사람의   영어능력만을   먼저 보고  

미리  판단해버리는 것도  뉴질랜드 정부의   Over Action이다.    



어능력은  각자  스스로 의   몫이지   

정부 국가가  나서서   미리  걱정할  일  아니다.



현행  영어능력 시험 제도로 인해   오히려  지금 현재  뉴질랜드에는  특정 국가의  이민자만  계속 유입되고  

늘어난다는 점.     

뉴질랜드 사람으로서  나는  우리나라의   미래가   걱정이다.     




뉴질랜드  정착하면서   수많은  어려움과  아픔을  거친 후   6개월 만에   나는  일자리를   찾게 되었고  

그 후  24년 동안  지금 현재까지  나는  당시  여자 영사분에게  했던  그  멋진 말,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  



일본인 관광객을 주로 받는  선물용품 점 가게에 서   1시간당   7불을  받으며  쓰레기 수거 , 청소담당으로서 첫 일자리를  시작했었고  -  파트타임이지만.      

쥐꼬리 월급이지만   일을  하면서   나도   당당히   뉴질랜드에  세금을  내기 시작한다는  사실 자체에  

괜히 혼자  기분 뿌듯해졌다.      


그런데  이것이  뉴질랜드에  과연  도움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제부터  나의 이야기가  계속 시작된다.  


                                               카이코라 Kaikoura 해변가에서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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