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생활 체험수기 -3
1993년 1월,
얼마 후 가족들이 무사히 도착하고
말 그대로 ZERO부터 시작했다.
우리는 새로운 인생을 말도 안 통하는 새로운 곳에서.
24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나 스스로에게 완벽한 Reset을 한 셈인데
세상에 태어나 한번 인생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Reset를 하지 않을까.
나의 Reset을 위해서 한국에서 가진 것을 다 내려놓아야 했다.
제법 인정받고 잘 나가던 직장, 급료, 집, 차, 친구들..
다람쥐 쳇바퀴처럼 매일매일 굴러가던 그 곡예를 한순간에 멈추고 내려서야 했다.
ZERO라는 단어 자체는 멍청해 보이기도 하지만 참 멋있게 보였다.
나 스스로를 ZERO로 만들어보는 것도 그 쉽지 않은 용기이지만
당시엔 뉴질랜드를 전혀 몰라서 무지해서 더 용감했었을까.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천근만근 무겁게 부담 느껴졌던 것도 또한 사실이었다.
이민자를 위한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크라이스트처치 폴리텍 , Christchurch Polytech에서 운영하는 수업인데
가장이 공부를 할 경우 실업자로 분류되어
정부로부터 오히려 돈을 받을 수 있다는 복지제도로 인해
많은 이민자들이 몰렸었고 나를 포함,
2개월 정도 다녔을까 이 영어공부에 대한 회의가 점점 들기 시작했다.
대학교에 가기 위해 영어가 필요한 게 아님에도
매일매일 책상에 앉아서 읽고 쓰고 하는 것에 점점 지쳐갔고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나처럼 영어 잘 못하는 같은 이민자들끼리 모여 앉아서
영어공부를 한다는 자체가 얼마나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어공부의 최종 목적을 이민지가 현지 사회 정착 , 특히 일자리 찾기에 목표를 둔다면 ,
지금 같이 영어공부를 하고 있는 이민자들 나에겐 미래의 경쟁상대 인 셈이었다.
내가 먼저 뛰쳐나가야 할 이유이었다.
영어공부에 대한 대가로 정부로부터 생활보조를 받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이 실업자 수당이라는 말자체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나를 무능력자처럼 판단한 듯해서
그리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와이프랑 의논했고 결국 우리는 이 보조를 안 받기로 했다.
지금 당장은 재정적으로 아쉽겠지만 나 스스로 와 딸에게 좀 더 떳떳하고 당당하기로.
책상 앞 영어공부와 실제로 현장에서 부딪히는 영어공부 중 나는 후자를 택했다.
이민 이나 유학을 목표로 둔 후배님들에게 나의 방법이 정답은 아니겠지만
아주 좋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24년이 지난 지금에도
하지만 이 결정은 결국 나를 더욱더 절박하게 만들었고
필사적으로 직장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감에 빠지게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일자리를 찾았지만
당시 내가 절박하지 않았다면 일자리도 없었을 듯.
첫 직장에서 월급을 받았는데 세금이 엄청나게 많았던 기억에 놀랬고
일을 전혀 안 하고 실업자 수당을 받고 있는 이민자 친구의 복지수당과 비교해보니
그다지 별 큰 차이가 없어서 더 놀랬었다.
누가 열심히 일을 하고 쥐꼬리 월급에 세금까지 내려고 할까
“ 그렇게 고생하면서 일을 할바엔 차라리 한국에 있지 왜 나왔어요.?”
실업자 수당을 받고 있는 한국인 친구는 외제차를 몰고 매일 매일 골프장으로 출근하여 운동을 한다.
나를 만날 때마다 농담조로 던지는 질문이다.
그 친구는 결국 한국으로 역이민 해서 돌아갔다.
" 뉴질랜드에서는 해 먹을 게 없다 " 가 그 친구의 역이민 이유이었다.
과연 그럴까.
이민자 정착을 위한 이러한 정부의 지나친 복지제도가
오히려 이민자들의 자생력을 약화시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난민자, Refugee 가 아니고 이민자, Migrant이다.
내가 선택한 나라 와 나라가 선택한 사람은 무엇이 다를까.
먼 장래에 내가 뉴질랜드의 정치인이 된다면 꼭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뉴질랜드는 나의 나라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