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생활 체험수기 -7
좋은 사람들 과 만나다.
클라라 Clara는 혼자 사는 이웃집 젊은 여자이다.
우리 집 펜스 위로 처음 얼굴을 보여준 여자.
웃으며 “하이”라고 먼저 인사를 걸어왔다. 그러다가 가끔 우리 집에 놀러도 왔다.
한국산 커피도 마시도 잠깐 놀다가 갔는데 , 기억으로는 우리가 클라라 집에 찾아가 본 적은 없었다.
자꾸 말을 걸어올 꺼봐 무서웠는지도.
먼저 인사를 해온 이 클라라는 우리가 영어도 서툴고 ,
뭐든지 도움이 필요할 경우 말을 해달라고 했다.
“ 도와주겠다고”
“ 도와달라고 말을 해야 도와준다. “
그 말은
“ 말을 안 하면 도움을 못 받는다..”라는.
클라라는 우리 집에 놀러 와서 6개월짜리 딸아이를 안아 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때마다 아이는 처음 보는 파란 눈에 울었었고.
뉴질랜드에 와서 처음으로 만난 키위 친구, 먼저 다가와서 먼저 인사를 해주어 고마웠다.
안드레아 Andrea는 우리 가정 주치의이다.
뉴질랜드 도착해서부터 그녀와 만났으니 지금 까지 24년째이다.
이민 초기 갓난아기는 자주 아팠었고 안드레아에게 보여주려고 데려 가지만
와이프는 영어 소통이 잘 안되고 엄마로서 답답한 마음에
그녀 앞에서 와이프도 그냥 울고 아이도 울고 그랬었다.
와이프는 아이를 두 손으로 안고 한 손에는 영한사전 다른 한쪽 손에는 한영사전을 들었었야 했었다. 언어소통의 어려움에 대한 고충은 의사인 안드레아가 오히려 더 있었겠지만
친한 언니처럼 와이프부터 편안하게 안정시켜 주었었다.
한국에서 보았던 의사들이랑 전혀 달랐다.
10분이고 20분이고 서로가 모든 질문을 다 묻고 서로 다 대답하고.
일방적이지 않은 의사와 환자 서로간의 충분한 대화.
특히 아기에 대해서는 우선순위로 최고의 신경을 써주었다.
어느 날 아이가 설사가 심해서 안드레아에게 데려갔다가 와이프는 또 말이 잘 안 통했고
답답하고 급한 마음에 와이프는
다시 집으로 달려가 사용했던 기저귀들을 다 들고 전부다 펼쳐놓고 보여주었다는 이야기는
지금까지 전설이 되었다.
그렇게 울어대던 그 아기는 24년 후 바이올린리스트가 되었다. 성악가는 안되고
아기 덕분에 와이프 영어가 점점 늘기 시작한 것은 분명하다.
캘로 린 Carolyn 은 우리 아이들에게 거의 친척 과 같다. 안티 Auntie 라고 부른다.
큰딸부터 작은딸까지 우리 대신 아이들을 자원하여 도맡아서 키워준 고마운 분이다.
여전히 영어가 부족한 우리는 아이들 학교에 긴급 비상 연락처로 그녀의 이름을 적었었고
아이들 학교 숙제부터 시작해서
일주일 한 번씩 뉴질랜드 음식을 해 먹이면서 식탁 에티켓 및 뉴질랜드 문화를 손수 가르쳐준 분.
2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 번씩 아이를 부른다. 밥 먹으러 오라고.
고마운 분이고 전형적인 착한 뉴질랜드 키위 스타일을 보여주신 분
아무도 아는 이 없는 이곳에 이러한 천사가 있었기에 우리는 이곳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그후 나는 이분의 이름을 망설임없이 나의 유서에 올렸다.
이곳에서 이런 좋은 분들을 만난 것 그것은 나 의 "복"이었다.
뉴질랜드에서 받은 만큼 나도 뉴질랜드를 위해 뭔가 하고 싶어졌다.
한국을 떠나는 이민이나 장기유학을 할 경우
도착지 현지 공항에 누가 마중을 나와 있느냐에 따라서
성공 여부가 결정된다는 말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나의 경험으로는
그분들의 도움으로 인해서 우리의 전투 영어도 점점 발전? 해나갔다
영어는 절박해야만 정복 가능한 언어라는 말
점점 실감 나게 다가왔다.
그렇게 뉴질랜드도 점점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