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생활 체험수기-8
첫 직장을 가짐.
그 어렵다는 첫 직장을 가졌음에도 파트타임에 월급 수입이 적어서
드디어 우리의 은행 잔고는 점점 낮아져서 $ 600 ( 약 48 만원 정도) 정도까지 낮아졌다.
급기야 와이프는 한국서 가져온 인형이나 장신구 등을 모아서 길거리 마켓 , Sunday market
에 앉아서 $ 1, $ 2 짜리 장사를 시작했다. 아마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일 듯.
나는 김치 깍두기를 조그만 비닐 한 봉지에 $ 5 씩 만들어서 일본인들에게 팔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국산 깍두기를 매우 좋아했었다. 주문이 꽤 나 있었고.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라도 팔고 한 푼이라도 벌어야 했었다.
와이프는 가계부도 썼고 매일매일 한 푼씩 절약했다.
그럼에도 와이프는 한 달에 한 번씩 맥주 한 병을 사주었다. 고맙게도.
가끔씩 만난 한국인 이민 동기 친구들은 나에게 물었다.
“ 그렇게 진상 맞게 고생하며 살바엔 한국에 있지 왜 나와서 고생하느냐 “
“ ……. “
실업자 수당을 받으며 그렇게 여유 있게 말할 수 있는 그들이 솔직히 부러웠다.
하지만 24년 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나의 결정에 매우 만족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나는 아무것도 없지만 꽤나 멋있었다.
얼마 안 되는 월급 , 2주마다 받는 Pay Slip 은 뜯어볼 때마다 기분 좋았다.
기념품 선물가게에서 쓰레기 수거 담당으로 열심히 일하던 중 1년이 지났을까.
모 여행사에서 나에게 오퍼가 왔다. 일본어도 하고 컴퓨터 키보드도 하고
영어 도 하니깐? Tour Operator로 앉아서 일하는 사무실 근무를 제안받았다.
시간당 $10로 받았으니 월급이 꽤나 올라간 셈.
그것도 좋지만 이젠 샐러리맨처럼 넥타이 매고
사무실 실내에서 앉아서 일하게 된다는 점이 나를 기쁘게 했고
그날 밤 맥주 한 병을 추가로 사서 와이프와 기분 좋은 건배를 했다.
매일매일 재미있게 열심히 일하던 중 또 1년이 지났을까. 놀랄만한 기적이 생겼다.
한국을 뒤로하고 먼 이곳까지 이민을 왔는데, 한국 국적기가 크라이스트처치까지
취항을 하게 된 것. 해서 공항에서 일할 직원을 뽑는다는 이야기를 언뜻 들었는데
어떻게 어떻게 나를 찾아왔고 풀타임 오퍼 제의가 들어왔다.
연봉 $ 30,000 계약 조건으로.
그렇게 나는 뉴질랜드에서 세 번째 직장으로 스카우트가 된다.
그날 밤엔 나도 와이프도 같이 울었던 것 같다.
분명한 것은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크라이스트처치 공항
이 공항에서 약 2년 정도 근무하였는데 이곳에서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웠고
또 수많은 키위 친구들을 만들 수 있었다. 공항 경찰, 이민국 직원, 세관직원 등..
공항 내 통제구역 내에서 한국어 통역이 필요할 때마다 나는 불려 다녔었고
난 기꺼이 자원봉사를 했다.
밤 시간, 새벽시간 비행기가 도착할 때마다 한국 관광객이 문제 발생될 때마다
때를 가리지 않고 전화가 걸려 왔다.
불편했지만 행복했었다.
누군가를 위해 내가 뭔가 도움이 된다는 사실 그 자체에.
영어로 인한 의사소통의 불 폄 함은 매뉴얼대로 질문을 해야 하는 공항의 뉴질랜드 공무원이나
영문도 모르고 공항 내에서 잡혀서 초초하게 나를 기다려야 하는 한국인이나 똑같았다.
모두가 나를 원했었고 나는 모두를 행복? 하게 할 수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모두가 빨리 일을 끝내고 집으로 가기를 원했었기에.
공항에서 영어 통역 자원봉사는 오히려 나에게 영어공부가 되었고
이를 계기로 한 발 더 나가서 뉴질랜드 경찰서에 무보수 자원봉사 신청을 하게 된다.
매주말마다 경찰국에 나가서 시작하게 된 자원봉사는 그 후 12년 동안 계속되었고
그 경력은 우연히도
향후 내가 뉴질랜드 사회에서 일을 할 수 있는 큰 디딤돌이 되었다.
나는 이 정도로 운이 좋은 사람이다
이민자가 현지사회 정착을 위해서
시도해 볼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보수 자원봉사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가 "우리나라" 라고 생각하면 쉬운일 이지만
여전히 "남의 나라" 라고 생각되면 어려울수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Hanmer Spring 핸머스프링 가는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