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복소복 눈처럼 집으로 돌아간 외할머니
내가 아장아장 걸을 무렵, 엄마의 아빠가 죽었다.
내가 대학생 2학년 종로 3가 롯데시네마에서 신나게 영화를 보고 나오던 날, 아빠의 아빠가 죽었다.
코로나가 한창일 2020년 보름달이 꽉 차다 못해 쏟아질 것만 같던 추석 전날 밤, 아빠의 엄마가 죽었다.
그리고 올해 봄 햇살이 따스하던 일요일 낮에 엄마의 엄마가 죽었다.
그렇게 엄마 아빠의 엄마 아빠가 모두 돌아가셨다. 네 분 중 처음인 외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30년이 지난 올해, 마지막으로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
내겐 부모보다 더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었던 네 사람이었다. 다섯 살과 열다섯 살, 스물다섯 살 모두 무릎에 누워 마냥 어리광을 부릴 수 있었으니까.
이제는 세월에 지워져 흐릿해진 추억을 더듬으며 몇 차례의 장례를 치르면서도, 종종 부모를 잃은 우리 부모님의 모습에서 미래의 내 모습이 보여 슬펐다. 나는 종종 (언젠가 결국 올 테지만) 아직 한참 먼 미래를 상상한다. 때로 그 상상은 너무 정교하고 생생해서 나를 괴롭게 한다. 어느 날 엄마를 잃고, 아빠를 보내고 울고 있을 내 모습이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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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외할머니는 정이 많은 분이었다. 정이 많다, 다복하다, 사람이 좋다 등의 표현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외할머니다.
정이 많다는 건 본인 것을 남들에게 준다는 뜻이다. 본인의 시간, 본인의 음식, 본인의 돈... 무엇이 되었든, 가만히 있으면 그냥 내 것일 무언가를 굳이 손 내밀어 남을 챙기는 행위. 생각해 보면 ‘정’이란 건 그 절대량이 정해져 있을지도 모른다. 본인에게 남는 것이 적더라도 일단 그들은 주는 것이다. 남이 남처럼 느껴지지 않게, 외롭지 않게.
예전에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살던 동네 근처 군부대가 있었다. (다행히) 젊은 그들은 꽤나 부유했고, 동네 지나가는 군인마다 먹으라며 닭을 삶아 내주었다고 한다.
세월이 할머니를 할퀴어 남편과 아들 둘을 먼저 보내고 혼자 지내신 날이 많았다. 그때는 또 골목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널부러 놓은 쓰레기봉투를 깔끔하게 여미는 일을 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청소부 아저씨가 외할머니에게 그만 고생하시라 했다고 하니.
그렇게 정 많은 외할머니 눈에 나는 항상 마르다 못해 ‘뼈다귀만 있는’ 상태였고, 할머니 집에 가면 항상 고깃집 냉면그릇 같은 큰 밥그릇과 제사상에 올려도 꽉 찰 만큼의 과일을 먹고 오곤 했다. 언덕을 내려오는 내 백팩 안에는 차마 다 먹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싸감’당한 배와 사과가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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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의 상태가 위독하다고 마지막 인사를 하러 병실에 찾아 간 밤. 앙상하지만 따뜻하고 힘 있던 할머니의 손을 잡고, 눈을 맞추고, 사랑하고 고맙다는 말을 연신 해댔다. 심장이 제멋대로 빠르다 느리다를 반복하던 생의 마지막 순간. 그 순간들 중 조금이라도 안정이 찾아오려면 할머니는 병원의 미소천사라는 별명답게 주변을 거니는 간호사와 의사를 보며 미소를 보냈다.
"할머니, 할머니 이제 영감님(할아버지)도 만나고, 외삼촌도 만나고, 막내삼촌도 만날 수 있어. 거기서는 편히 쉬어."
"아이고, 진짜?"
"응, 진짜야."
"거기 완전 우리 집이네?"
"맞아, 할머니 집에 가서 다 만날 수 있어."
"아이구, 좋네."
집에 갈 수 있다며 순간 반짝이던 눈, 커지던 목소리. 할머니는 그날 밤을 넘겼지만 그다음 날은 채 버티지 못한 채 '우리 집'으로 돌아갔다.
먼저 죽은 남편과 두 아들이 있는 집에 잘 도착한 걸까?
장례를 마치고 묘에 안장하던 그 순간 내내 맑던 봄하늘에 작고 예쁜 눈이 내렸다.
나는 집에 잘 왔으니 걱정 말고 잘 지내라는 할머니의 따뜻한 목소리가 귀에 스치는 듯 선명했다.
그렇게 나는 작은 눈이 오는 날마다, 아픈 몸에도 몇 번이나 일어나 부엌을 오가며 손녀딸 가방에 사과, 배, 오렌지 등을 욱여넣던 투박하고 마른 손이 생각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