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태권도 학원차에 태워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바닥에서 팔락 거리는 종이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쓰레기겠거니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바람이 불고 종이가 팔랑 떼구르르 움직이더니, 내 앞까지 굴러왔다. 천원이었다. 음? 고개를 들고 주변을 봤다. 정확히는 종이가 날아온 방향을 봤다. 아무도 없었다. 팔락. 천원 녀석이 팔락팔락 거리기에 나도 모르게 한 발로 살포시 밟았다. 돈의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녀석을 임시 보호할 생각으로 발을 뻗었을 뿐이었다. 진심이었다. 만원도 아니고 천원이었기에, 날름 줍고 싶은 생각도 별로 들지 않았다.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한 발로 천원을 즈려 밟고 서서 오도가도 못하고 잠시 기다렸다. 앞을 봐도 심지어 뒤를 봐도 이 골목에 사람이라고는 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위를 봤다. 건물에서 누군가 실수로 떨어뜨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들고 유리창들을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앞, 뒤, 위까지 아무도 없었다. 어쩌지. 갈등했다. 이대로 녀석을 놓아줄까, 바람에 실려 가고픈 곳으로 날아갈 수 있게 녀석을 풀어줘야 하는 걸까 고민했다. 고민과는 반대로, 천천히 몸을 숙여 녀석을 잡아 올렸다. 엄지와 검지 끝으로 녀석의 귀퉁이를 잡고 멈춰 서서 또 잠시 기다렸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집으로 움직였다. 누군가 나타나서 천원을 찾으면, 내가 가지려고 한 게 아니라 날아가길래 잡고 있었다는 설명을 할 수 있는 몸짓을 하고 천천히 집으로 걸었다. 역시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1층 문을 열면서도 뒤를 돌아봤다. 누군가 헉헉대며 천원을 찾는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 돌아봤다. 하지만 조용했다. 탁, 계단에 첫 발을 올렸다. 그리곤 타박타박 계단을 올랐다. 첫 계단을 밟자마자 왠지 발걸음이 빨라졌다. 내가 가지려 한 것은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가져 버렸고, 이젠 변명도 하기 어려운 상황. 천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최선을 다해 2~3계단씩 다다다다 계단을 올랐다. 집 문을 열 때쯤엔 숨이 차올랐다. 헉헉 거리며 문을 닫았다. 헉헉. 적막한 집에 퍼지는 내 숨소리를 들으며 신발을 서둘러 벗었다. 문을 닫고서 찔러넣었던 천원을 풀어줬다. 사뿐히 식탁에 놓이는 천원을 보자, 풉- 마스크 사이로 웃음이 샜다. 너무 웃겼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전력을 다해 계단을 올랐나 생각하니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아, 진짜 웃긴다."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말했는데 헉헉 거리며 말하는 내 목소리가 집안에 울려 퍼졌다. 아무도 없는 집. 당연히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집안을 가득 채운 공기가 나에게 말을 거는 듯 했다. 왜 그래, 왜 이 고요를 깨는 거야.
괜히 조용조용 걸어 다니며 숨을 고르고 외투를 벗는데, 문득 공허했다.
쪼그려 앉아 핸드폰을 잡았다. 이 재미있는 일화를, 고작 천원으로 숨이 터질 만큼 계단을 뛰어올라온 이 뜬금없는 달리기를 누군가와 너무 공유하고 싶었다. 연락처를 열었다. 오후 2시. 직장에 있을 지인들 얼굴이 떠올랐다. 점심시간 직후인 시각. 나름의 피곤함을 이겨내며 다들 일을 하고 있을 터였다. 육아휴직 뽐내는 것도 아니고 뜬금없이 전화해 '천원을 주웠어' 하려니 민망했다. 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있을 지인들 얼굴도 떠올랐다. 오후 2시. 집에 있다면 가장 시간이 더디게 가는, 오전의 피곤함을 그득 안고 점심을 먹었거나 치우고 있거나 할 시각. 괜히 시덥잖은 일로 연락해 더 피곤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망설여졌다. 조용히 핸드폰을 내려놨다. 문득, 외로웠다.
천원을 줍고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것에, 잘 느끼지도 않던 외로움이라는 녀석을 만났다. 오랜만이었다. 별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 그것이 시덥잖은 일일수록 더더 고민하게 되는 것 같다.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하다가 결국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그 순간 문득 외로움을 마주했다. 깊이 깊이 넣어두어 수면 위로 잘 떠오르지 않는 감정. 오랜만에 마주한 외로움은 참 커다란 덩치의 감정이었다. 순식간에 고개를 들고 나를 집어 삼키려 다가오는 감정을 다시 누르려 애썼다. '뭐하려고 했던 시간이지?' 하며 미리 세워둔 계획표를 보고 책을 읽었다. 생각을 길게 이어갈수록 '걱정'이란 녀석이 튀어나오고, 걱정이란 녀석이 몸을 불려 나가기 시작하면 '두려움'이란 녀석이 나를 잡아먹으려 했기에, 비는 시간을 없애려 애쓰는 요즘이었다.
슬픔도 외로움도, 마주하면 마주할수록 참 수도꼭지 같았다. 좀 놔둬보자 하고 틀어놔 버리면, 계속계속 새어나와 자리를 넓혀갔다. 결국은 흘러 넘쳐 옷자락을 적시고 오들오들 떨게 만들었다. 오들오들 떨 때쯤 되면, 또 다른 우울이란 녀석이 천천히 다가왔다. 외로움, 걱정, 슬픔, 두려움같은 녀석들은 꼭 우울과 함께 나를 찾아왔기에 모른 체 하려 최선을 다했다. 깊이 깊이 빠져봤자, 그 끝은 우울이었다. 새어나오지 않도록 꽉꽉 꼭지를 잠그고, 문을 닫고, 뒤돌아 서서 바쁘게 정신 없이, 바깥으로 바깥으로 정신을 굴렸다. 고작 천원 때문에 외로움을 만나다니. 역시 남의 돈은 욕심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집에 돌아온 아이를 챙기다 문득 식탁에 놓아둔 천원이 눈에 들어왔다. 별 생각없이 천원을 자랑했다.
"아들, 아까 너 차 태우고 집에 오다가 길에서 천원 주웠다."
손에 들고 팔랑팔랑 흔들어 보였다. 아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엄마, 그걸 집으로 가져오면 어떡해. 주인 찾아줘야지."
"찾아주려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오더라. 그냥 두고 오긴 아깝잖아."
아뿔싸. 진심까지 말해버렸다.
"그럼 길에 두고 와야지! 스쿨랜드에서 그러라고 했어.”
"...... 스쿨랜드가 뭔데?”
“ebs 교육방송! 창문 밖으로라도 던져버려.”
“......”
ebs에서는 아이들에게 뭘 가르치는 것일까. 다음엔 꼭 같이 봐야겠다 생각했다. 창밖으로 던지면 너무 위험하니, 내일 나가는 길에 주웠던 그 곳에 가져다 놓기로 약속했다.... 솔직히, 지키지 않을 약속일 수도 있지만 일단은 약속했다.
역시, 외로움은 위험한 감정이었다. 9살 아이를 상대로, 나불나불 입을 열게 만들어 버리다니. 상대를 생각하지도 않고 일단 기대게 만들어 버리다니. 이대로는 곧 외로움의 친구 녀석들이 떼로 몰려올 것만 같았다. 절대 이번에는 지지 말아야지. 수도꼭지를 꽉 잠그고, 새로운 계획들을 세워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