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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Apr 19. 2021

너무 좋은 책 '암과 살아도 다르지 않습니다'를 읽었다

애정과 존경심을 담아 써 본 이연 작가님의 첫 책 '독후감'

우는 건, 질색이다. 남들 앞에서든 혼자 있을 때든 우는 건 싫다. 울고 나면 후련해진다고? 울 일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말이었다. 이런 저런 삶의 굴곡과 유약한 성격 탓에 울 일은 내게 꾸준히 일어났고, 울지 않으려 이를 악물어도 어쩔 수 없이 울게 됐다.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나신 후엔 더 심해졌다. 이보다 더 울 순 없을 것 같은 상태로 울고 나서도 후련함따윈 없었다. 우는 건 감정이 흔들리는 것이었고, 감정이 흔들리는 게, 나는 싫었다. 감정의 굴곡 따위 없는, 평온한 일상을 꿈꿨다. 영화도 스릴러만 팠고, 책도 무미건조한 것만 골라 읽었다. 투병기, 감동실화, 모성애 등은 내게 금기단어였다. 무조건 피했다. 진짜 감정을 건드릴 만한 스토리들은 철저히 외면하며 살아왔다. 


그런 나였기에, 브런치를 떠돌다 '삶의 촉수'(필명 이연)님 글을 만났을 땐 피하는 게 당연했다. 제목만 보고 어떤 내용인지도 모른 채 우연히 읽어버린 것은 분명 '실수'였다. 훅 빠져들었다가 눈물 콧물 다 빼고 나선 꺼 버리고 싶었다. 작가님은 암 투병중이었고, 많고 많은 암 중에 유방암이었고, 두 분 따님을 둔 어머니였다. 도무지 객관화할 수 없는, 스스로가 초연해질 수 없는 단어들이 글 속에 가득했다. 구독을 눌러서는 안됐다. 하지만 망할 손가락이 뇌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구독을 눌러버렸다. 


단문으로 이어지는 힘 있는 필체. 그게 문제였다. 꺼버리고 싶은데 끌 수가 없었다. 단문으로 글을 이어가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단문들 안에 투병에 엮인 그 많고 많은 감정들을 담아내기는 또 얼마나 어려울지. 상상도 안되는 필력에 '이성적으로' 홀렸다가, 또 '감성적으로' 빠져 질질 짰다. 정말 우는 건 질색이었지만 여러 개의 글을 '홀린 듯' 읽고는 혼이 털리는 느낌이었다. 진짜 싫다, 우는 건 진짜 싫어 하면서 또 다음 글이 보고 싶어졌다.

진지하게 생각했다. '이건 분명, 이미 출간을 한 어떤 작가가 운영하는 서브 계정 일거야.' 

작가소개를 꼼꼼히 다시 살폈다. 책 얘기가 없었다. 아, 출간한 책은 다른 주제인가보다. 암에만 집중하고 싶어서 운영하는 '부캐'가 '삶의 촉수'인가보다.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그렇게 며칠을 밤마다 울었다. 구독하는 작가님도 몇 분 없는 브런치 초창기. 삶의 촉수님은 꾸준히 글을 올리셨고, 피드에 뜨는 그 분 이름에 홀려 '최신글 하나만 읽고 나오는 거야' 하면서 들어갔다가 [다 키워놓고 쓰는 육아일기-출간 예정], [어쩌다보니 부부로 25년을 살았다] 등 다른 매거진도 접하게 됐다. 젠장. 글에 홀려 질질 울다보면 '또 당했다' 하는 마음이 들었다. 정말, 나는, 울고 싶지 않았다. 내 세상에 울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글에 '홀려' 밤마다 울다니. 핸드폰이나 모니터로 보는 것도 힘들어 죽을 맛이었다. 자꾸 울면서 읽어대니 눈이 아팠다. 

구독을 끊을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글이 너무 좋으니 읽으면 도움이 될거야'하는 이성과 '이렇게 우는 건 싫어'하는 감성이 싸워댔다. 그때쯤 작가님이 나를 구독하시며 내 글에 '라이킷'을 눌러주셨다. 그리고 한창 질질거리며 글을 쓰고 있는 나를 꾸준히 응원해 주셨다. 작가님의 응원은 '특이했다'. "힘들어요" 써두면 대부분 "힘내세요" 했지만, 작가님은 "힘들면 힘들어 해도 되요", '토닥토닥' 댓글을 달아주셨다. 도망가기엔 너무 늦었구나, 단념해야 했다. 


나 역시 작가님 글에 라이킷을 누르고 댓글을 달았다. 그럼에도 그럴 때마다 조심스러웠다. 내 어머니의 끝은 불행했고, 나는 그 끝에 대해 꾸준히 써 내려가는 중이었기에 내 존재가 작가님의 평화로운 일상을 침범할까 늘 염려스러웠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던 건? 멈출 수 없었음을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이기적인 이유였다. 


나는, 이연 작가님 글을 통해 단문의 힘을 다시 배웠다. 글이 늘어질 때마다 작가님 글을 보며 부사와 형용사들을 잘라내곤 했었다.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으로, 작가님 글을 통해 위로를 받았다. 내 어머니의 투병을 돌아볼 수 있었고, 17살 그때의 감정에 빠져 허우적대며 살았던 20여 년을 지나, 당시 어머니 마음을 조금은 알 수 있게 됐다.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이런 과정을 거치셨겠구나 짐작하게 됐다. 그 누구의 팬도 된 적 없던 내가, 팬이라고 스스로를 인정하며 댓글을 달았다. 그렇게 탈탈 털리고 팬이 됐다. 팬으로서, 작가님의 출간소식이 기쁜 건 당연했다. 책을 받아들었다. 인간은 경험으로 배움을 얻는 동물. 휴지를 옆에 끼고 읽어내려갔다. 





'암과 살아도 다르지 않습니다'(이연 지음/248쪽/봄풀출판)는 작가님이 적으신 소개글에도 나와있는 문장이었다.  사람살이는 다 비슷하고, 암과 살아도 다르지 않다는 그런 내용을 본인의 소개글에 적으시는 작가님의 마음같은 건 감히 짐작도 하기 어렵다. 어쨌든 같은 이름으로 브런치북을 발행하셨고, 출판사에서도 그 제목 그대로 출간을 진행했다. 브런치를 통해 글을 읽을 때도, 지면으로 구성된 책을 읽을 때도 첫 소감은 '제목 최고다'였다. 이 제목만큼 책 내용을 다 담아내는 제목을 새로 만들기란 어려운 일이었으리라. 



#1. 암에 대한 나의 편견을 만나다 


이 책을 굳이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저자 본인의 암 투병기'이다. 그럼에도 단순한 투병기록과는 다르다. 암과 싸우는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만, 저자 본인이 말하듯 암에 대한 정보는 극히 적다. 어떤 날은 슬프고 어떤 날은 기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의 일상 이야기다.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묻게 된다. 

"암은 저자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휜 나무는 '상처'가 있는 거라고 했다. 상처를 이겨내기 위해 휘기를 선택하는 거라고. 나무는 휘면서 삶의 궤적을 몸으로 기록했다. 숲에선 똑바로 서지 못하고 땅에 닿을 듯 쓰러진 나무도 있었다. 그런 나무도 봄이면 꽃이 폈다. (...) 숲은 쓰러지고 휘어지고 뒤틀려도 삶이 멈추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며, 내 몸을 점령한 암세포를 몰아내느라 애쓰지 말고 암과 공존하라고 했다. 나는 암과 싸우는 걸 그만두었다. 암과 살아가기로 했다. (158p)


2017년 암 선고를 받고, 2020년 재발 후 지금까지. 저자는 암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 여정이 책 안에 오롯이 깃들어 있다. 저자의 투병기. 그 글들을 읽으며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과정을 거친다는 '애도의 5단계'가 떠올랐다. 건강했던 '과거'의 몸과의 이별. '현재'의 몸을 받아들이는 과정. 저자가 말하듯, 그 누구도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 과정을 수용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 아팠을까 생각하는 것도 독자의 입장일 뿐. 저자는 때로는 너무나 슬프게 때로는 너무나 유쾌하게 그 상황들을 풀어낸다. 글을 읽으며 함께 절망하다가 함께 웃다가 하며 빠져 있다가,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암 투병기에서 기대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저자 역시 묻는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픈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 핏기 없는 피부, 파란 혈관이 도드라진 팔뚝, 바짝 마른 외모, 깨작거리는 식욕, 초점 잃은 퀭한 시선, 날 선 감정, 생존을 향해 번들거리는 눈빛, 빈약한 걸음걸이, 말라버린 눈물 자국. 나는 위에 열거한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아픈 사람이었다."(178p)


나 역시 '암' 하면 이런 시선을 가졌음을 깨달았다. 어머니의 투병을 모조리 지켜보고도, 그 투병 안에 있는 사람이 무엇을 느끼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딱히 궁금해하지 않았었다. '큰 병'에 걸린 사람은 365일 24시간 내내 절망할 것 같았고, 그 병에서 1초도 자유롭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아직 병에 걸리지 않은 '나와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라며 선을 긋고 싶어 하고 있었다. 암 투병기도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평범한 공감대를 느끼는 건, 암에 대한 기본 태도가 아닌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내 안의 이분법을 만났다. 


사람들 인식 속 암은 '사형 선고'였다. 내게 암은 현실이면서 비현실이었다. 엄마와 언니가 암 환우였다. 가까이에서 보는 그녀들의 삶은 일반인과 다르지 않았다. 평온해보였다. (...) 
내가 아는 죽음의 유형은 '자연사' 아니면 '자살'이었다. '병사'는 인생 시나리오에 없었다. 어느 날, 암 환우가 되었다. 병듦이 점령한 삶엔 '병사'가 추가되었다. (p7)
항암치료 당시 구토억제제를 처방받아 복용했다. 두통약, 해열제도 처방해줬다. 그것 말고도 항암제의 부작용으로 나타날 증상에 대비해서 이런저런 약을 처방했다. 복용 타이밍은 증상오기 전이었다. 증상이 나타난 이후 복용은 의미없었다. 
나에게 정말 필요한 약은 따로 있었다. '슬픔억제제'. 슬픔이 덮치기 전 복용하는 약. '절망억제제'. 절망이 싹트기 전 복용하는 약. 마음의 통증을 막아줄 약은 어디에서도 처방받지 못했다. 그건 스스로 조제해야 했다. (p40-41)


'아직' 암에 걸리지 않은 나는, 환우들과 다른 입장에 스스로를 놓고 있었다. 그들의 절망과 슬픔을 더듬더듬 가늠하면서도, 감히 '위로' 할 자리를 찾아 기웃거리고 있었다. 병에 걸린 그들과 건강한 나. 이분법으로 명백하게 선을 긋고, '언젠가' 아플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라며 고개를 돌린 내 모습을 책을 읽는 내내 돌아봤다. 



#2. 암은, 남의 일일까?


채혈 담당자와 간호사들은 내 팔을 보고 입 모아 합창했다. 

- 혈관이 안 보여요.
제 눈에도 안 보이네요. 
- 혈관이 도망 다녀요. 
걔가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맨날 어딜 그렇게 도망 다닐까요?
-혈관이 약하시네요. 
독한 항암약 쏟아부었으니. 튼튼하면 이상한 거겠죠?
-혈관이 숨어요.
하다 하다 숨바꼭질까지? 얘는 밀당의 고수인가요?
- 에고, 채혈 힘들겠네요.
쉬운 적 있었나요? (p 71)


이 부분을 읽으며 후훗 웃었다. 나도 모르게 웃었다가 이내 정색했다. 

'아니야, 이건 투병기야. 얼마나 아프셨겠어, 웃으면 안돼' 하며 마음을 다잡는 스스로를 문득 느꼈다. 왜 웃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을까? 암은 '무서운' 병. 그 병과 싸우는 과정을 읽으며 웃는 건, 건강한 이의 사치쯤으로 느껴졌다. 그럼에도 이어지는 생각들. 실제 고통을 겪는 이들이 '웃어 넘기자' 애쓰는 이 과정을, 나는 무슨 자격으로 정색하고 바라볼 수 있을까. 왜 그들의 감정에 동화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왜? 그들은 아프고, 아직 나는 건강하니까? 이 무슨 구분법일까. 웃음을 담아 쓴 글, 웃어서도 안된다고, 그들의 세상과 나를 나누고 싶었던 것을 아닐까. 

새삼 책 제목이 떠올랐다. "암과 살아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 저자는 이렇게 다르지 않다고 외치며 병을 직면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그 세계에서 나를 떼어놓고 병 자체를 진지하고 심각하게 대하며 입에 올리기도 어려워하는 스스로를 보게됐다. 


'암 앞에서 사람들의 일반적 반응은 난감함과 과한 친절이었다. 동정 어린 시선은 덤이었다'(p 137)는 작가의표현 그대로 나 역시 그러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는 상황'에 처한 환우들을 상대로, 난감해 하거나 과하게 친절하거나 했던 우리들. 환우들을 위해서? 아니, 명백히 그건 나를 보호하기 위한 외면이었다. 


50대 회사 선배가 대장암으로 병가를 냈던 기억이 떠올랐다. 검진 결과를 들으러 간다더니 그 길로 '휴직계'를 냈던 선배. 들리는 소문에는 바로 입원을 해서 수술을 한다고 했다. 세 형제의 아버지인 그. 첫째가 대학생이었던가. 삼삼오오 모일 때마다 수군거렸다. "언제 돌아오는 건데?", "몇 기래?", "돌아올 순 있는 거야?"같은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했었다. 

진심으로 '회복'을 바라면서도, 그건 철저히 '남의 일'로 치부했다. 별 일 없이 무사히 출퇴근 하는 우리의 입장에 '안도'했던 우리들. 마치 나에게는 절대 없을 일인 양 그렇게 행동했었다. 유방암으로 어머니를 잃고 유전이니 뭐니 떠들면서도, 여전히 이런 이분법 세상에 살고 있었다. 그 선배가 길고 긴 휴직 끝에 회사로 돌아왔을 때는 어땠던가. 나를 포함해 대부분이 이렇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 괜찮아?
사람들은 나만 보면 물었다. (...) 사람들은 괜찮은 사람에겐 괜찮냐고 묻지 않는다. 사람들은 내가 괜찮지 않은 줄 뻔히 알면서 끊임없이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괜찮지 않았지만, 괜찮다고 대답했다. (...) 나는 괜찮지 않았고 앞으로도 괜찮지 않을 걸 알았지만, 사람들이 실망할까 봐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p 126-127)


며칠 전, 또 다른 회사 선배와 밥을 먹었었다. 그 선배는 머뭇머뭇거리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괜찮아요?" 하고 내게 물었다. 작년 6월이었으니 꽤 지난 일이었음에도 묻는 것은, 분명 걱정이고 관심이리라. 자세한 이야기를 나눌 만한 상황은 아니었으므로, 듣는 다른 귀들을 배려해 "괜찮지 않으면 어쩌겠어요"하고 대답했던 나. 


괜찮냐는 질문을 나 역시 참 많이 들었다. 괜찮다고 여러 번 얘기하다가 너무 괜찮은 것도 이상한 건가 싶어서 대답을 바꿨다. 괜찮지 않으면 어쩌겠어요. 따라 죽을 만큼의 슬픔은 아니고요, 근데 또 아무 일 없는 듯 살아갈 일상은 아니고요. 부친상에도 이 정도 괜찮냐 세례를 받으니 암환우에겐 오죽하랴 싶어 깊게 반성하고 공감했다. 이젠 정말 스스로에게 묻고 싶었다. 암환우와 나, 이렇게 나누는 거 이상한 거 아니야? 



#3. 투병기, 그 다음은


어머니의 생활 중 암에 걸릴 만한 건 무엇이었을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여러 번 생각했었다. 돌아가신 이후 나이를 먹으면서 '유방암'과 관련된 정보가 보이면 이성적으로 읽어봤다. '내가 살기 위해서'였다. 읽으면 읽을수록 의문스러웠다. 어머니의 식단이나 습관은, '건강' 그 자체였다. 채식. 소식. 숙면. 그럼에도 암에 걸려 돌아가셨다. 내 습관은 육식. 과식. 불면. 아직은 암에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내내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다. 그럼에도 암은 걸리지 않으셨다. 이거 '복불복'이구나. 두 분 부모님을 보며 생각했었다. 


사람들은 내가 암이라니까, 어쩌다 암에 걸렸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지적했다. 너는 네가 잘못해서 아픈 거고 나는 내가 잘해서 건강한 거야. (....)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을까? 나를 들여다보기에도 하루해가 짧았다. 암세포보다 지독한 자기검열. (p86)

온종일 어디서부터였을까 어떻게 잘못된 걸까 같은 질문을 무한 반복하며 시간을 축냈다. (p149)


저자의 엄격한 자기 검열의 시간을 보며 깊이 공감했었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여기까지였다. 육체를 바라보는 검열까지. 하지만 저자는 검열 그 다음 과정으로 훌쩍 나아간다. 과거를 검열한 다음은, 현재의 자신을 잔인하다싶이 면밀히 객관적으로 들여다본다. 


환우들은 욕망을 버린 금욕주의파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뤄둔 욕망을 실현하는 탐욕주의파로 나뉘었다. 금욕주의파 표정은 평온하지만 섬뜩했다. 탐욕주의파 표정은 활기찼지만, 인공의 냄새가 진동했다. 과다한 희망 주입이 불러온 부작용. 그 어느 파도 아닌 나는 '암 통합 진료과'에서 시간을 보내다 진료시간에 맞춰 대기실로 이동한다. (p233)


저자의 객관화는, 저자 스스로에게 너무 잔인하다 느껴질 정도로 '무미건조'했다. 과도한 희망도, 처절한 절망도 온전히 내려놓은 상태. 환우들을 객관화하고, 그 안의 스스로마저 객관화하고 자신의 위치 '지금 이대로'를 받아들여 버린다. 감히 '수용'이라 이름 붙여도 될 경지라 느꼈다. 수용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말했다. 
-봐봐. 모든 게 나쁜 건 아니라니까. 암 때문에 글쓰기를 얻었잖아. 
(...)
죽음을 담보로 한 교환이었다. 온전한 몸과 맞바꾼 온전한 영혼. 이 거래를 통해 얻는 이익은 무엇이고, 손해는 무엇일까. 왜 나는 '건강'과 '글쓰기' 둘 다 가지면 안돼? 고작 두 개 잖아. 왜 나는 이 정도에 감사하고 만족해야 해?


암 환우. 글 쓰기. 사람들은 그 정도도 '다행이네' 입을 모았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입장 차이'였다. 병에 걸리지 않은 이들이, 마치 우월한 입장인듯 건네는 위로. 그 위로와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저자는 정확하게 지적한다. 

우린 암 환우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그저 살아만 있으라고? 살아만 있으라는 건, '아직' 건강한 우리가 '이미' 아프게 된 사람들에게 내밀 수 있는 위로일까 가식일까. 무엇이 그리 다르다고 거만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 무엇도 꿈꾸지 말고 '살아만 있으라'는 그 높다란 벽을 저자는 담담히 바라본다. 그리고 건강하든 건강하지 않든, 모두가 찾아야 할 그 존재를 벽 너머에서 발견한다. 


"암환우인 내게 사람들은 엄마니까, 아내니까 살아야 한다고 했다. 엄마가 없는 아이들이 안쓰러우니까, 아내가 없는 그가 불쌍하니까. 그 누구도 나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다른 누가 아닌 나를 위해 살고 싶다. 그 이유가 필요했다. 내가 나로 존재해야 하는 이유. (p245)


모든 상황을 인식한 후 저자가 만나는 것은 바로 '자아'다. 자아를 덮고 있던 이런 저런 감정과 관계들을 모두 철저히 '객관화'한 후, 깊고 깊숙한 곳에 남아있던 자아를 꺼낸다. 그 자아는 글쓰기를 통해 점차 모습을 드러냈고, 세상 밖으로 나온 자아는 갈수록 몸집을 부풀리며 미래를 꾼다. 


암환우가 된 이후 욕망은 누르고, 희망은 거부하고, 기적은 부정했다. 수도승처럼 살았다. 2017년 8월에 암 환우가 된 후 내 인생에 2020년 크리스마스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 이후 오늘이 아닌 미래는 판타지였다. 2021년 크리스마스. 그날을 희망해본다. (p234)


대서사도 없다. 그냥 담백하게 '희망해본다'가 저자가 품을 수 있는 최대치의 미래다. 그럼에도 온전히 세상 밖으로 나온 자아가 미래에 건네는 인사이기에,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의미가 전해진다. 


책 제목을 다시 본다. 암과 살아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 책을 통해 우선 내 안의 커다란 벽을 만났다. 부와 빈, 정상과 비정상, 건강과 건강하지 않음, 이런저런 잣대로 나와 다른 사람을 나누고 경계하려는 스스로를 보게 됐다. 

또 하나, 과연 이 책이 암에 대한 이야기인가 생각하게 됐다. 처음엔 '암'에 방점을 찍고 제목을 봤지만, 책을 모두 읽은 후엔 '살아도'에 방점을 찍게 됐다. 이 책은 그저 '살아감'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 모두처럼, 우리와 다르지 않은 한 사람이, 너무나 큰 고통을 겪은 후 자아를 찾아가는 이야기였다. 슬픔과 절망이 넘치는 투병기가 아니라, 희노애락을 모두 담은 삶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소소한 고통을 겪는 나 역시 2021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 있노라 말씀드리고 싶어졌다. 그때쯤엔 우린 지금보다 조금 더 편안해져 있기를 바라며 크리스마스를 기다린다 말씀드리고 싶어졌다. 벌써 1년이 다갔어요,하며 인사드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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