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 나는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고, 오빠가 심드렁하게 전화를 받자마자 외쳤다.
"아이고, 조실부모하신 우리 오라버님, 뭐하고 계시나 궁금해서 전화드렸습니다."
헛소리를 하는 39살 여동생에게 41살 오빠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야, 그렇다대. 오늘이 어버이날이라대. 진짜 몰랐다."
"........."
미혼의 40대 독거남에게, 아무도 어버이날인 것을 알려주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오빠는 보통의 토요일을 맞았고, 여느 날과 다름없이 느지막이 일어나 집 정리를 하고(.... 거짓말이다. 솔직히 써야 하는데 예쁘게 포장해 주고 싶은 동생의 마음).. 오빠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느지막이 일어나 게임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하나의 스테이지를 깨지 못해 며칠 동안 애를 쓰는 중이었다고, 아주 구체적으로 말했다. 그러던 중 오빠의 기혼자 친구가 전화가 와서 "점심이나 먹자"고 대뜸 말을 했고 그 친구는 코로나 시국에 걸맞게 오빠 집으로 찾아왔다. 토요일에 갑자기 웬일이냐 묻게 됐고 오빠 친구는 "어. 버. 이. 날이라서 와이프 친정 같이 가려는데 일이 있어서 나는 못 가고, 니랑 밥이나 먹으려고 왔다"고 말했단다.
"어? 어버이날? 오늘?"
그렇게 오빠는 오늘이 어버이날인 줄 알게 됐단다. 친구는 말을 잃었고, 나는 이야기를 들으며 깔깔 웃었다.
"오빠, 제발 어디 가서 조실부모한 티 좀 내지 마. 날짜도 모르고 그러니까 티 나잖아."
오빠도 웃으며 대답했다.
"작년엔 병원에 전화라도 했는데, 챙길 사람이 없어서 날짜도 몰랐다."
조실부모했다고 서로를 놀려댔다. 어디 가서 티 나지 않게 날짜를 잘 챙기자며 웃었다.
오빠의 절친 중 20대에 부모님을 한 달 간격으로 떠나보내고 폐인이 되었다 사회로 돌아온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오빠가 '조실부모'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늘 지적을 한다고 했다. 마흔 전에 일찍 부모님을 보내는 것이 조실부모라고, 너희 남매는 마흔이 다 되었기에 그 단어를 사용하기엔 적절치 않다고 한댔다.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오빠는 저녁에 그 친구와 술이나 한 잔 할 거라고 했다. 아마, 또 엄청나게 마실 것이라 예상되는 술자리였다.
" 카네이션 살 돈으로 술 먹는 게 모토다."
"미친..."
그런 통화를 했다. 우린 그저 웃었다. 우는 건, 조실부모한 티를 내는 행동이므로 서로 조심하기로 했다. 아, 조실부모라는 단어도 우리끼리만 사용하기로 했다.
오늘만 3개째의 글이다. 낮에 발행을 누르려다 '얘가 할 일 없이 글이나 쓰고 있네' 하는 누군가 있을까 봐;; 망설이다 저장만 눌렀고, 한 번에 올리자 생각했다. 알람을 켜 둔 누군가가 계시다면 죄송할 따름. 아이는 어버이날 행사를 위해 시댁으로 갔고, 나는 글을 썼다. 앗, 이런 날에 이렇게 발행을 해버리는 건 부모님 안 계신 티를 내는 건가. 티 내지 말자 얘기했건만, 이렇게 또 티를 내게 되었다.
만들어둔 목차가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별 스트레스도 받지 않고 쉬엄쉬엄했다고 생각했는데, 월요일쯤 보니 몇 개의 목차가 남지 않았었다. 그날 낮엔 아이가 미술학원에서 카네이션을 만들어 왔고, 어버이날이 다가오는구나 생각했었다. 어버이날까지는 다 끝내볼까 마음먹고 초안이라도 열심히 썼다. 그 초안들을 살찌워 오늘에 끝내는 것이 어버이날을 맞이하는 태도였다. 실패했다. 딱 하나의 꼭지만 남겨두고, 그냥 일기나 쓰자 마음을 바꿨다. 마지막 순서의 글을 지친 상태로 마무리하고 싶진 않아서, 그냥 일기 같은 글이나 쓰자 생각하고 이 글을 쓰게 됐다.
요즘은 생각한다. 부모님은 이 글들을 보면 뭐라고 하실까, 궁금하다. 200%쯤 확신하건대, 두 분은 몹시 화를 내실 것 같다. 특히 아버지. '알코올 중독자'라고 저토록 소문내듯 여러 번 써둔 걸 보면, "이놈의 가시나. 미쳤나" 소리치실 것 같다. 어머니는 부끄러워하실 것 같다. 가정사를,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 써서 올리는 일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실 것 같다. 조용히 있으면 남들은 모르는데, 자랑도 아닌 걸 뭘 그렇게 써두냐 하실 것 같다. 그럼 어때. 어차피 못 보실 텐데. 내 마음이다. 메롱.
처음 브런치에 글을 올리며 쓴 소개글로 보면 나는 완전 거짓말쟁이다. 나는 이혼과 한부모가정의 아이 돌봄과 그런 일상에 대해 써볼 예정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었다. 그러다 왠지 부모님 이야기로 넘어왔다. 이혼 과정은 예상보다 너무나 늘어졌고, 그걸 계속 붙잡고 들여다보는 것이 괴로웠다. 다른 생각을 하고 싶었다. 글로 옮길 만한 다이내믹한 일들도 벌어지지 않았다. 아이와의 일상에 문득문득 떠오르는 부모님. 그런 걸 써볼까 생각했었다.
쓰다 보니 아쉬웠다. 내 머릿속 부모님은 상당히 구체적인 '스토리'를 가지신 분들인데, 글 하나하나에 담긴 부모님은 피상적인 존재로 그려질 뿐이었다. 글도 쌓이고 있었고 "나도 투고란 거 한 번 해볼까"하는 마음이 들던 무렵이었다. 책을 어떻게 쓰는 건지 그 방법을 정리해둔 책들이 제법 많았다. 몇 권을 읽었고 그들이 안내하는 대로 목차를 세웠다. 그리곤 오늘까지 그냥 줄줄 정리해봤다. 겹치는 내용들이 많은 것 같고, 수정할 일이 까마득하지만, 일단은 계속 써봤다.
떠오르는 일화들을 다 쓸 수 있다는 점, 그게 가장 기뻤다. 언제 내 기억에서 휘발되어 버릴지도 모를 일들을 글로 옮겨두는 게 뿌듯했다. 중간중간 많이도 울었고, 때로는 '이제 별로 안 울고 이런 걸 쓸 수 있네'하는 글들도 있었다. 나는 편안해졌나. 어떤 작가님 말씀처럼 조금 가벼워졌나. 살은 더 쪘고, 마음은 좀 많이 홀가분해진 느낌이다. 글은 정말, 훌륭한 안정제 역할을 해내고 있다. 그리고 목표 완료가 다가오는 뿌듯함.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 뿌듯함이 기쁘다.
어버이날. 명절. 그 모든 날들이 굉장히 새롭게 다가오는 1년이었다.
"작년까진 그래도 뭘 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년 여가 흐르는 동안, 매번 이 말을 하곤 했다. 작년의 어버이날엔 코로나로 문병이 금지되어 간호사실에 전화를 드렸었다. 안부를 여쭤달라 말씀을 드렸다. 직접 통화를 하지는 않았다. 돌아보니 그 인사가 직접 전한 마지막 인사였다. 마지막이 될 줄 몰랐던, 마지막 인사였다.
올해와 작년, 카네이션을 사는데 10원도 들이지 않았다. 돈을 아끼는 것은 좋은 일일까. 친구들은 식사라도 신경 써야 할 텐데, 어우, 나는 얼마를 아낀 거야. 나갈 예정도 없던 돈을 '아꼈다'고 포장하고 말아 버린다. 그래. 이제 카네이션 살 일은 없겠네. 내년에도 후내년에도 어버이날은 돌아오겠지. 여기저기 돈 나갈 데가 많은 5월이었는데, 하나가 줄었다.
밖은, 바람이 많이 부나 보다. 아이도 없는 조용한 집에 덜컹덜컹 바람소리만 들린다. 식당에는 사람들이 많을까. 삼삼오오 가족들이 모인 풍경을 상상해봤다. 어디에 모여있든, 모두에게 오늘이 좋은 기억이 많아지는 날이었으면 좋겠다. 저 바람은, 이제 그만 좀 멈추면 좋겠다. 문득문득 추운 기분이 드는 건 역시 싫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