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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Nov 14. 2021

공간

(feat. 파티션과 이어폰)

"은신처가 있어야 해요. 타고난 본능이, 숨는 걸 좋아하거든요."

'곤충마트'라는 어마무시한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님은, 나와 그 사이에 놓인 도롱뇽 녀석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도롱뇽과 함께 살아야 할 내 처지에 감탄하느라 깊게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아이가 학교 과학수업에서 받아온 도롱뇽이었다. 몇 달 전엔 애벌레를 보내왔던 그 수업. 퉁퉁하고 하아얀 그런 애벌레를 예고도 없이 아이에게 쥐어보내 사람을 경악하게 만들더니, 다음엔 물고기를 보내왔고, 그 다음엔 마리모를 보내왔고... 이번엔 도롱뇽이었다. 세상에 도롱뇽이라니. 새빨간 배를 가진 녀석의 정식 명칭은 '파이어 벨리뉴트'라고 했다. 녀석을 마주한 첫 순간, 정말, 마음이 '파이어' 하는 느낌으로 타올랐다. 어쩌자고 이런 걸 아이들에게 덥석 줘버리는 걸까. 이게 정말 교육이 되는 걸까. 과학과 담 쌓고 지낸 내 젊은 날을 돌이켜 봐도 답은 알 수 없었지만, 정말 이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럼에도, 키워야했다. 처음엔 아이를 설득하려 애썼다. 녀석은 자연에서 살아야 한다, 강가로 가서 풀어주자고 설득했지만 정말 말 그대로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엄마라는 역할을 맡고 있는 나란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설명했다. 풀 한 포기조차 제대로 살려본 적이 없는 나였다. 집 안에 화분 하나 들이지 않는 건, 모조리 죽여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과학수업에서 받아온 애벌레도, 물고기도 그렇게 모조리 죽어나갔는데, 이 도롱뇽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많아 보였다. '생존'. 녀석의 생존을 위해서 우리가 풀어줘야 한다고 수차례 설득했지만, 아이는 설득되지 않았다. 이 모든 과정 끝에 찾은 것이 곤충마트였다. 함께 살아야만 하는 거라면, 녀석에게 맞는 환경이라도 갖춰줘야 할 것 같았다. '돈빨'이라도 세워보면, 온갖 아이템이라도 갖춰보면, 내 손에서라도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거 참. 우스운 상황이었다. 내 집도 없는 가난뱅이 주제에, 도롱뇽이 살 집을 마련해줘야 하다니. 널찍한 평수의 수조를 마련하고, 장판처럼 새 흙을 깔아주고, 2~3일에 한번씩 급여해야 한다는 '냉동 지렁이'까지 구매했다. 텅 빈 수조에 하나하나 자리를 잡아가는 아이템들을 보며 '할 만큼 했다' 싶었다. 친절하신 곤충마트 사장님은 녀석에게 무엇을 어떻게 먹여야 하는지도 알려주셨다. 얼어있는 지렁이를 녹이고, 핀셋으로 정교하게 지렁이를 집어, 도롱뇽 입 앞에 갖다 먹여줘야 한다는 이야기. 설명을 듣는 내내 팔이 간지러웠다. 지렁이들이 팔을 타고 기어오르는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차분히 끝까지 설명을 들었고, "아.... 네" 같은 적당한 추임새도 넣었다. "저는 못해요!" 소리지르며 뛰쳐나가지 않은 스스로에게 정말 놀랐다. 이런 참을성이라니. 나의 어른스러움에 감탄하며 어른답게 카드를 내밀었고 얼른 집에 가서 눕고 싶다고 생각했다. 도롱뇽이고 지렁이고 더는 모르겠고, 그저 포근한 침대만 떠올랐다. 급하게 발걸음을 떼려는 그때 사장님이 덧붙이신 한마디. 

"아! 길에서 큼지막한 돌멩이 하나 주워다가 깨끗이 씻어서 넣어두시면 좋을 것 같아요."

".... 돌멩이요?"

이건 또 무슨 개똥같은 소리인가 싶었다. 도롱뇽과 지렁이와... 이젠 돌멩이까지. 과학교실따위, 다시는 신청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을 때 사장님이 말씀하신 것이 '은신처'에 대한 이야기였다. 녀석은 본능적으로, 숨는 것을 좋아한다고. 

"혼자 있으면 외롭지 않을까요? 친구로 한 마리 더 사는 게 좋을까요?"라는 내 질문에 이어진 답도 비슷했었다. 

"그건 사람이 보는 눈이고요. 얘들은 '본능적으로' 혼자 있는 걸 더 좋아해요."

흠, 본능이라.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숨는 걸 좋아하는 게 본능이구만. 고개를 끄덕이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 도롱뇽을 회사에서 떠올린 건, 파티션 아래로 잔뜩 목을 접으면서였다. 할 수만 있다면 거북이처럼 어깨 사이로 머리를 집어넣고 싶은 그런 심정이었다. 할 일은 잔뜩 쌓여있었지만, 퇴근 시각이 다가오고 있었다. 퇴근 전에 서류를 마무리 해 팀장에게 넘기고 정시에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는 압박감. 내가 늦어지면, 학원차를 타고 돌아오는 아이를 맞이할 사람이 없었다. 빨리빨리. 마음은 급박했지만 도무지 진도는 나가지 않았다. 초조한 내 마음과 다르게 뒷자리의 통화소리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저 사람이, 오늘 저녁에 누구와 만나 무엇을 먹는지를 듣고 싶은 마음이 정말 1도 없었지만 그는 온 사무실 사람에게 사적인 약속에 대해 알리고 싶은 것 같았다. 조 사장에 이어 이 박사에게로 전화를 돌렸고, 메뉴 선택에 대한 갑론을박을 이어갔다. 

"에이, 그 오리집은 너무 짜지 않아?"

"삼겹살집은 너무 시끄럽던데? 막걸리 어때?"

내 공간으로 부여받은 파티션 벽 안에서 고개를 아무리 깊이깊이 숙인다한들, 파티션을 넘어오는 통화소리까지 막을 방법은 없었다. 


본능적으로 숨는 걸 좋아한다는 도롱뇽을 떠올리며, 비장의 아이템을 꺼냈다. 이런 순간을 위해 미리 준비해둔 나의 아이템. 노이즈 캔슬링 기능까지 갖춘 이어폰이었다. 특유의 '멍'한 느낌과 함께 이어폰이 작동했고, 통화소리를 막기 위해 조용한 클래식까지 켜버렸다. 은은한 내 세계가 구축된 느낌. 높은 웃음소리 정도가 그 세계까지 침범해왔지만, 충분히 참아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온전히, 집중이란 것을 할 수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동굴이 있어야 해.”

어디선가 마주했던 그 글귀가 문득 떠오른 건 왜 였을까. 도롱뇽에게 돌멩이를 마련해주듯, 회사는 파티션이라는 물건으로 개인 '동굴'을 마련해줬다. 그리고 나란 인간은, 그 동굴 안으로 넘어오는 소음까지 차단하고 나서야 편안함을 느꼈다. 


공간에 대해 다시 떠올린 건 퇴근길 자동차 안에서였다. 신호대기 중. 옆 차선엔 버스가 멈춰섰고, 버스 안 사람들이 모두 착용하고 있는 마스크로 눈길이 갔다. 나만의 공간에 있던 나는 당연히 마스크를 벗은 채였다. 신호대기 중인 막간을 이용해, 신나게 코도 파고 있는 중이었다. 손가락 끝에 걸리는 코딱지를 꺼내던 나는 마스크를 낀 버스 안 사람들을 바라봤다.  


운전을 하면서 종종 도로 위 운전자들이 모두 달팽이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걸어다닐 때는 몰랐던 기분. 자기만의 공간 안에서 느릿느릿 목적지를 향해 가는 사람들. 집을 짊어지고 느릿느릿 가는 달팽이처럼, 다들 저마다의 무게를 짊어지고 움직였고, 그들의 차는 달팽이의 집처럼 보였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화장을 했고 누군가는 담배를 폈고 누군가는 전화를 했다. 공동 공간인 대중교통 안에서보다 더 자유로운 느낌. 초보운전자 나부랭이인 나는 운전을 하면서 화장도 전화도 하지 못하는 주제였지만, 그럼에도 코를 팔 수 있는 단계까지는 업그레이드 되어 있었다. 코를 파면서 난생 처음으로 '아, 이래서 자차가 좋은 거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여태껏 '차를 사길 잘했군'하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대중교통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일 때 '차를 사길 잘했다' 생각한다고 남들은 말했지만, 전혀 공감이 되질 않았었다. 멀리 갈 운전실력도 없는 상태에서 연습 삼아 할 수 있는 건 출퇴근이 전부였기에, 늘 대중교통이 훨씬 편하다고 생각했었다. 나보다 백배 아니 만배쯤 운전을 잘 하는 분들이 운전을 해주시고, 신호 같은 건 아예 보지 않아도 됐고, 심지어 이동하는 와중에 눈을 감고 쉴 수도 있는 버스 안이 늘 훨씬 마음이 편했었다. 돈 먹는 하마같은 차의 가치를 단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지만, 코딱지 덕분에 차의 가치를 깨달은 순간. 차는 이동수단이기도 했지만, 하나의 '개인 공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나의 개인공간에 앉아 무사히 주차 할 수 있기를 꿈꾸며 달리던 그 무렵. 출퇴근 길에 매일 보는 아파트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사는 이 지역에서 가장 비싸다는 아파트. 교통의 요지에 떡하니 자리잡은 주제에 큰 평수만 존재해서, 웬만한 사람들은 꿈도 꿀 수 없는 가격이라는 곳. 이 동네에서 배달앱을 켜면 늘 저 아파트 이름은 따로 적혀 있곤 했었다. 

"*** 아파트는 진입로까지만 배달 가능하며, 배달료는 추가 청구됩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꿈꿀 수도 없는 곳은, 출입 역시 까다로운 모양이었다. 웬만하지 않게 돈을 번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은, 확실히 폐쇄적이었다. 이 아파트만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비싼 아파트들은 죄다 넓었고 경계가 확실했다. 돈을 벌면 벌수록 사람들은 더 넓고 더 폐쇄적인 곳으로 옮겨가는 듯했다.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나 역시 그 말에는 격하게 동의할 수 있었다. 마음 깊이 동감하는 만큼, 의문이 들기도 했다. 


사람은 과연 사회적 동물이 맞을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와 당연하다 믿으며 살아왔지만, 정말 그것이 사실인지는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사회적 존재이기에 사회적으로 기능해야 하고, 사회적으로 문제 없이 남들과 어울려야 하며, 사회 유지를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이야기들. 조금 불편해도 '사회성'에 문제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 참아왔던 시간들. 이제는 정말 궁금해진다. 사람은 정말 사회적 동물일까. 인류가 이룩한 문명사회는 분명 사회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인간 자체가 본능적으로 정말 '사회성'을 가진 존재인지는 점점 더 확신하기가 어려웠다. 사적 영역을 그렇게 확보하고 싶어하는 존재를, 사회적 동물이라 이름붙여도 되는 것일까? 인간이란 존재에게 사회성이란 어쩌면 생존 방식이 아니었을까. 이 대단한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학습 당한 특성인 것은 아닐까. 


나만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사회적 존재로 온전히(?) 기능하고, 인간관계에서도 별 어려움은 없지만, 그럼에도 스스로를 '사회적 존재'라 인정하기는 어려운 기분. 온전히 혼자일 때 가장 마음이 편하고, 어느 정도는 조용해야 비로소 집중이란 것을 하게 되며, 홀로 조용히 멍 때릴 때 '행복함'을 느끼는, 이런 내가 과연 사회적 동물이 맞을까. 살면 살수록 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동굴형 인간'과 '사회적 인간'. 무엇이 인간의 본능에 더욱 어울리는 단어일까. 둘은 정말 상충되는 개념 같은데, 두 가지 특질을 함께 갖고 살아가는 존재라니. 그래서 인간으로서의 삶이 더 고달픈 것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그 어떤 미래에, 나를 누군가가 내다 팔면 이렇게 얘기할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이 호모 사피엔스는 본능적으로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숨는 걸 즐기죠. 그런데 우습게도 외로움도 잘 느껴요. 혼자 두면 외로워하면서도... 늘 혼자있고 싶어하죠. 뭘 어쩌라는 건지. 참 이상한 놈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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