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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May 13. 2022

거울

오늘도, 거울의 방에 앉았다. 왼쪽 오른쪽 뒤쪽까지, 사방엔 거울이 가득하다. 그 거울들 어디에도 내 모습은 없다. 나 역시, 그 거울들로 나를 보려 하지 않는다. 그저 거울이 보여주는 다른 이의 모습만 바라본다. 어른만 앉을 수 있는 거울의 방. 그곳의 거울들은 나를 비추지 않는다. 남들은 어디로 가나, 그것만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진짜' 거울의 방은 달랐다. 작년이었던가. 아이와 '거울 미로'라 이름붙여진 곳을 찾은 적이 있었다. 거대한 방 가득 거울로 미로를 만들어 두고, 거울들 사이에서 '길'을 찾아 탈출해야 하는 곳. 아이들이 노는 곳이라 우습게 생각하고 들어갔다가 완전히 길을 잃어버렸었다. 앞뒤양옆을 채운 거울들 사이에서 통로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어이쿠, 이 아줌마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지?'

코 앞에 등장한 거대한 사람의 모습에 발걸음을 멈췄었다. 상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저분도 당황했겠지, 하며 옆으로 비켜서려는 찰라 상대도 나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제야 그게 나라는 걸 깨달았다. 거울로 막혀있는 곳마다 내 모습이 나타나 나를 막았다. 사방이 나로 가득찼고, 스스로의 거대함에 감탄하던 때에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엄마! 어디로 가야해?"

가만히 아이의 손을 쥐었다. 그래, 나는 혼자 있는 게 아니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출구를 찾아줘야만 했다. 이곳은 미로. 아이 역시 사방을 가로막은 본인의 모습에 주춤주춤 거리고 있었다. 탈출이 우선이었다. '올바른' 길을 찾아야만 한다는 압박을 가지고 더듬더듬 길을 찾아 나섰던 그때.


거울 미로를 떠올리며 멍 때리던 그 순간, '빠앙-' 하나의 소리가 나를 깨웠다. 거울의 방에선, 내가 나를 볼 수 없는 것처럼 상대의 진짜 모습도 볼 수가 없었다. 커다란 방만 시야에 들어올 뿐. 그 방마다 들어앉은 사람들은 나처럼 거울을 보며 각자의 길을 찾아갈 뿐이었다. 소리와 빛으로 의사표현을 하는 것이 이 세계의 룰이었다. 조금만 미적거리면 '빠앙-' 뒤에서 경고음이 울린다. 말이 되지 못한 단어들이 들리는 것도 같다. 

"비켜", "정신차려", "그 수준이면 길에 나오면 안되지"

눈 앞에서 불빛이 깜박인다. 아아, 노란불일 때 지나갔어야 했는데. 내 마음과 상관없이 빨간불이 켜졌다. 불빛은 이 세계의 법칙이다. 어쩔 수 없이 멈춰섰다. 시각을 확인한다. 아뿔싸, 또 지각인가. 신호야 바껴라. 초록불이 들어오고, 부리나케 움직이려........하는데 옆사람이 더 빨랐다. 슝-하고 내 옆을 지나가더니, 깜박깜박 불빛으로 신호를 보낸다. 양보하란다. 나도 지각이지만, 상대도 급한 모양이었다. '빵!' 소리를 지르려다 참았다. 한 명쯤 내 앞에 끼워준다고해서 지각이라는 대세를 바꾸기는 어려우리라. 


'후....' 

지각이라는 대참사를 담담히 받아들이고, 화장실로 향했다. 내 몰골이 어떤 상태인지를 한번쯤은 보고 싶었다. 눈을 뜬지 2시간 여가 지나 있었지만,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얼굴에 물을 바르고, 아침 준비를 하고, 점심 도시락을 챙기고, 아이를 깨우고, 먹이고, 같이 나와서 그대로 움직인 상황. 마스크가 있다는 게, 모두가 당연한 듯 마스크를 쓴다는 게 차라리 다행스러운 요즘이었다. 천천히 마스크를 내리고 거울을 바라본다. 

'어이쿠, 눈에 핏줄 선 거 보소.'

'사춘기냐, 이 나이에 웬 뾰루지.'


얼굴에 책임을 져야하는 나이가 됐다고들 했지만, 좀처럼 책임지기는 어려운 몰골이었다. 하긴, 얼굴 상태 따위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습관적으로 화장을 하며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생각했다. 그리곤 아이의 스케줄, 퇴근 전까지 끝내야 할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거울 속 내 모습이 유독 피곤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이 아니지, 립스틱을 바르지 않아서 인거지. 그제야 마무리로 립스틱을 발랐다. 하얗게 칠해진 얼굴, 빠알간 립스틱. 마치 광대처럼도 보이는 거울 속 사람. 스스로의 모습이 낯설어 씨익 웃어본다. 거울 속사람도 나를 따라 웃는다. 


"어우, 이만하면 됐어."

눈을 바라보며 말해준다. 그래 이만하면 됐지. 이게 지금의 내 모습. 노년도 멀게 느껴지지만, 청춘도 아----------주 멀게 느껴지는 그런 얼굴. 웃으면 팔자주름이 먼저 보이는 그런 얼굴. 두툼한 술살을 자랑하는 그런 몸. 빠알갛게 충혈된 그런 눈. 그게 지금의 나야. 그게 뭐. 

죄 없는 거울을 째려보며 한 번 더 말해준다. 

"이만하면 됐지. 뭘 더 바래."


내 말에 힘을 실어주려,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으려 거울에서 눈을 돌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정말, 이만하면 괜찮지 뭘.

남들은 어찌살까, 남들은 어디로 갈까, 나만 뒤처진 건 아닐까, 이 길이 맞나, 이 모습이 맞나, 생각해서 뭐할텐가. 지금의 나는, 이 모습인걸 부정해본들 뭐할텐가. 

"경로를 이탈하여 재검색합니다" 목이 터져라 외치며 도와줄 내비게이션도 없는 삶. 그저 이 길이 맞다, 이 모습이 맞다, 뒤처졌든 아니든 여기가 내 자리다, 하고 생각의 고리를 끊어낸다. 남 눈치만 보는 시간은, 거울의 방에 앉을 때로 충분한 것 같다며 마음을 다잡아본다. 

지금, 이게, 내 모습. 지금 이게, 내 상황. 

이만하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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