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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Jul 05. 2021

쓰레기봉지

"나 이건 자신있어" 하는 분야, 누구나 하나씩 가지고 있을까?

나는 정말 자신있는 분야가 하나 있다. 수줍게 숨겨왔던 비밀이지만, 아니 자랑할 기회를 찾지 못해 말하지 못했지만,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가 하나 있다. 쓰레기봉지 채우기. 일주일 동안 모은 쓰레기봉지를 내어둘 때면 어깨를 으쓱하게 된다. 남들의 쓰레기봉지와 내 것의 크기를 비교하며 혼자 뿌듯해한다. 절약을 말하기엔 부끄럽다. 그저 단순히, 살을 잔뜩 찌운 봉지를 보는 게 뿌듯하다. 와, 저걸 저만큼 키웠네. 대단하네. 생각하곤 한다. 쓰레기봉지를 채우는 데 진심인 편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 첫 시작이 중요하다. 처음 쓰레기를 버리고 3분의 1쯤 채워졌을 때부터 바닥 공사에 들어간다. 봉지 안에 들어있는 쓰레기들을 최대한 뭉치고 꾹꾹 눌러 봉지바닥의 양 끝을 가득 채운다. 커피필터나 물티슈 등 누르면 누를수록 부피가 작아지는 아이들을 그 자리에 넣는다. 이후 코팅된 종이 등 덩치 크고 납작한 아이들을 봉지 벽면으로 배치한다. 위를 눌렀을 때 찢어지지 않도록 봉지에 담는 순간부터 녀석들의 위치를 세삼하게 잡아준다. 기초공사가 끝난 후부터는 꾹꾹 눌러주며 녀석의 목구멍까지 쓰레기를 채운다. 그리고는? 토할 듯 넘쳐흐르는 쓰레기를 진심을 다해 누르며 양쪽 손잡이를 묶는다. 너무 세게 당기면 손잡이가 찢어지지만, 비닐이라는 것이 적당히 당기면 아주 조금은 늘어나는 것이기에 끊어지지 않을 만큼 살살 당겨 길이를 늘린 후에야 묶는다.


중요한 건 힘 조절이다. 과유불급이란 명언은 쓰레기봉지 채우기에서 그 참뜻을 알려준다. 과한 욕심으로 사력을 다해 눌러버리면 기껏 해둔 이 작업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옆구리가 터져 버리는 것이다. 펑 터진 옆구리, 꾹꾹 눌러담은 쓰레기들이 터져 나오면 이성이 끊어진다. 욕지거리 한 바가지.

"하......ㅆ이ㅓㅏ모에뱌ㅕㅛㅎ.ㅏㅁ잉파ㅓ모ㅔㅐㅂㅏㄹ;ㅁㅇ리ㅏ머오레배힝"

깊은 한숨과 함께 테이프를 챙겨들고 비닐 옆구리를 살살 붙이는 순간,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지'하는 자괴감이 절로 든다. 뿌듯하려 시작한 일이지만 이쯤되면 근원적 의문을 품게 된다.

"왜 사니, 왜 살아?"

쓰레기봉지 앞에서 대답하기엔 다소 어려운 질문이므로, 이 질문을 맞닥뜨리지 않기 위해선, 역시 힘 조절이 중요하다.  





이렇게 눌러담는 것에 자신있던 나는, 감정도 그런 방식으로 처리하곤 했었다. 마음에서 느껴지는 온갖 감정들을 모른 체하며 그저 눌러 담기만 했었다. 몸은 똑딱똑딱 시계추처럼 집-회사를 왕복하며 할 일들을 했었지만, 그 모든 곳에서 느껴지는 감정들은 속으로 속으로 채워넣기만 했었다. 다들 그렇게 사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강해지는 거니까. 어른이 되어버린 스스로를 강해져야 한다고 몰아붙였다. 울지마, 약한 척 하지마, 버티는 거야. 간혹 '터질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긴 했지만, 어른이 되어가는 성장통쯤으로 여겼다. 


그즈음 알게 됐다. 온갖 감정들이 목끝까지 가득 차 버리면, 아무 것도 더 들일 수 없음을 몸소 체험하게 됐다. 용량 초과였다. 책을 읽어도 영화를 봐도 20분 이상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같은 페이지를 읽고 또 읽어도 무슨 말인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영화를 봐도 마찬가지. 눈이 화면을 보고 있어도 좀처럼 집중할 수가 없었다. 사람을 만나도 똑같았다. 대화 맥락을 따라 가려 애썼지만, 어느새 정신을 차리면 상대를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집중은, 한 뼘의 여백이라도 있어야 가능한 것임을 배웠다. 내 안에 여백이 있어야 그 여백의 공간에 온갖 생각들을 내려두고 다른 세상으로 빠져들 수 있을 텐데, 내 안엔 그 공간이 없었다. 남들 눈에는 멀쩡하게 보이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는, 점점 뭔가 이상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상온에 오래 내버려둔 떡같았다. 뻣뻣하게 굳은 채 곰팡이가 피어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살아가도 살 수는 있었다. 여백이니 새로운 자극이니 하는 것들 없이도 일상을 사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얼마나 사치스러운 고민인가. 여백이라니. 당장의 끼니 걱정, 견디기 어려운 고통, 생존의 위기 등 극한의 가치들 앞에서, 여백이니 하는 소리가 얼마나 사치스러운 투정으로 들리는지 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우습게도, 그 사치스러운 여백이 자꾸 그리웠다. 일상만으로는 2%가 부족했다. 내게 책과 영화와 사람은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면 어때?"를 알려주는 멘토같은 존재들이었다. 그 새로운 목소리에 집중해 볼 여유도 없이 일상을 살자, 2%의 부족함이 자꾸 나를 긁어댔다. 

계속 이렇게 살 수 있겠어? 

겉만 괜찮은 이 생활을, 언제까지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아?


10대엔 자랐고, 20대엔 꿈을 쫓았고, 30대엔 그저 버텼던 것 같다. 

터져버리는 쓰레기봉지를 볼 때마다 생각했었다. 얘가 터져버린 건 누구의 잘못일까. 

얇디 얇은 재질로 만들어진 봉지가 문제일까? 아니면 이 재질을 알고 있으면서도 무식하게 눌러버린 내가 문제일까?

요즘은 나를 보며 생각한다. 고작 39살에 사는 게 힘들다고 느끼는 건 왜일까. 나약하고 나약한 정신력이 문제일까? 아니면 정신 차릴 수 없도록 꾸준히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들이 문제일까? 

내 안의 문제이기도 했고, 바깥의 문제이기도 했다. 






힘들다고 생각만 해선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 가득 차버린 쓰레기봉지는 더이상 쓸모가 없었다. 길 위에 내놓는 건 집 안에선 쓸모가 다했기 때문이리라. 가득 차버린 나를 본다. 미지의 어떤 곳으로 떠나버리기엔 아직은 이른 것 같았다. 책임져야 할 생명도 있는 주제에, 함부로 이탈을 꿈꿀 순 없었다. 조금은 더 쓸모가 있어져야 했다. 


왜 이렇게 힘들까를 고민하다 깨달은 건, 내 용량의 한계에 대한 것이었다. 내 용량을 스스로 인정해야 했다. 나는 재질이 얇디 얇고 작고 작은 봉지였다. 쉽게 찢어지고 쉽게 가득 차 버리는 존재. 그 이상을 담으려 애썼던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됐다. 더 많은 것을 경험하려 애쓰고, 더더 담을 수 있다고 욕심내는 행위들. 그런 노력들이 용량초과가 되는 것임을 받아들여야 했다. 더더, 더더, 욕망하기엔 애초에 재질이 약했다. 내 한계를 받아들이고 나자,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차라리 편했다. 


삶의 무게를 객관화시키려는 노력도 멈추려 애썼다. 

"뭐가 힘들다고 그래", "너보다 힘든 사람도 얼마나 많은데"하는 말들. 스스로에게 꽤나 많이 던졌던 이 말들을 이제는 거둬들이려 한다. 

빚이 있으시군요. - 그건 8kg입니다. 

소중한 누군가가 떠났군요. -7kg짜리 슬픔입니다. 

아프시군요. -10kg입니다.

각자의 삶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을, 이런 절대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내 용량이 고작 이것밖에 안됨을 받아들이고 나니, 사람마다 용량이 다름도 이해하게 됐다. 삶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의 무게는 각자에게 다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용량도 제각각임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리고, 어떻게든 속을 비워 '여백'을 확보하려 애를 쓴다. 나는 2%의 여백이 있어야 하는 사람임을 깨닫게 됐다. 다른 사람의 기준이 무엇이 중요할까. 그저 자신을 알아가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나는, 속을 꾸준히 비워내야 새로운 것들을 넣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 여백을 위해 글이라는 것을 쓰고 또 쓰고 있음을 알게 됐다. 육아휴직 후, 글에만 매달리는 스스로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쉬어, 차라리 돈이 되는 걸 해. 요즘은 조금 알 것 같다. 나는 여백을 만들려 했던 것 같다. 내 안에 가득 담긴 것들을 세상의 빈 공간에 뱉어내려는 행위. 무단투기에 가까운 이 행위들로 인해, 내 안에는 여백이 생겨난다. 그 여백을 본능적으로 쫓아갔음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워낙 용량이 작은 봉지이기에, 이런 식의 무단투기를 꾸준히 이어가야함을 매일매일 깨닫는다.


결국, 삶은 각자에게 다른 형태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 그것을 배워가는 요즘인 것 같다. 






오랜만에 발행입니다. 오늘은 정말 발행을 해야지 하고, 써둔 글들 중 하나를 정리해 발행을 누릅니다. 정말 오랜만인 것 같은 느낌입니다. 혹시나 궁금하신 분이 계셨다면, 사죄드립니다.

퇴고로 바쁩니다,라고 작가처럼 말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만 ㅎㅎㅎㅎ 사실.. 바쁘진 않았습니다. 그냥 좀 지쳤던 것 같습니다. 바야흐로 기일 시즌이라.. 아버지 첫 기일을 보내고, 다음주 어머니 기일을 맞이하며 그 사이의 날들이 사람을 좀 무력하게 만들더라고요. 심지어... 이 시즌에 그걸 주제로 써둔 글들을 다시 들여다보고 보고 있으려니, 못하겠더라고요... 현실의 삶도 글 안의 삶도 온통 죽음이라;;; 아몰랑, 책이라 읽자- 아몰랑, 좀 쉬자- 하다보니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ㅠㅠ 

아마 또, 한동안은 글을 못 올릴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의 방학 전에 1차 퇴고라도 끝내고 싶었는데- 마치 수학의 정석에 빠진 것 같은 날들입니다. 정석 1단원은 집합으로 시작하는데, 제가 정말, 집합 파트만 10번은 본 것 같습니다. 2단원으로 넘어가질 못했죠. 지금도 그러고 있습니다. 첫 글 수정, 다음날 첫글 또 수정, 그 다음날 첫글 또 수정;;; 그런 날들이라 집중 좀 하고,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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