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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날엔 Nov 20. 2020

결혼생활이 왜 힘든지 묻는다면

결혼 이야기-함께 살아간다는 것은(8)

나름들의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상대적 박탈감' 때문이라 답하고 싶다.

빈부격차를 이야기 할 때나 나오는 그 상대적 박탈감 말이다. "부자는 저렇게 산다고요? 서민인 제 삶은 이런데요!" 할 때 나오는 그 상대적 박탈감. 어떤 이유로든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이 부부 중에 있다면, 그 사람의 박탈감을 '어떻게' '함께' 잘 풀어나갈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글로 옮기자면 “나는 이것저것 하는데, 너는 왜 안해?!” 하는 문장이 완성될 때, 부부싸움이 시작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주말, 늦잠을 잔 남편과 '아주 파이팅 넘치는' 대화를 나눈 기억이 난다. 매우, 몹시도, 파이팅이 넘쳤던 그 대화의 끝에 "대체 나는 언제 쉬라는 말인데?"라는 질문을 했었다. 너는 늘 늦잠을 자지만 나는 아니다, 나도 너처럼 늦잠을 자고 싶다, 너만 쉬냐 나도 쉬고 싶다 등등 엄청나게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질문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남편의 대답은 아주 간결했다.

"그건 니가 알아서 해야지."

내가 알아서 집안일과 육아를 하는 동안 그는 알아서 잠을 잔 것이다. 여태 '몰라서' 못 쉬었다는 아주 간단한 해법. 나는 그 대답을 듣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렇구나. 더 이상 말해 무엇하리.




둘의 성격과 자라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마찰이 생긴다는 설명은 상황의 반만 이야기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 모두의 성격과 환경은 다르다. 하지만 유독 왜 부부관계에서만 이 차이가 두드러질까. 매일 함께 부대끼는 부부니까? 그럼 연애 때는 서로 잘 이해하다가 결혼해서 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결혼 이후 한 집에서 지내는 시간 동안 어떤 미묘한 상대적 박탈감이 쌓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됐다. 나만 늘 양보하잖아, 나만 늘 이해하잖아, 나만 늘 치우잖아, 나는 늘 하지만 너는 안하잖아 등등의 문장이 완성되면서, 결국 싸움이 되는 게 아닐까.

결혼 후 너무너무너무 싸우다 보니, 대체 왜 싸우는 것일까를 오래 고민해보았고 결국 내 안에 쌓인 상대적 박탈감과 그 박탈감에 대한 남편의 몰이해가 주 원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매일 집을 정리하는 사람과 몰아서 한 번에 치우는 사람이 같이 살고 있다면? 매일 집을 정리하는 사람은 지저분한 집에서 지내는 일상이 견디기 힘들어지고 조금씩이라도 물건들을 제자리에 두기 위해 움직이게 된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상대의 물건까지 정리하게 되고, 이런 매일이 쌓이고 쌓이면서 '왜 나만 청소를 하는 건데'라는 문장이 완성되는 게 아닐까?


전업주부와 돈을 버는 남편. '남편도 바깥에서 힘들겠지' 하고 머리로는 잘 알지만, 하루 종일 아이의 뒤만 쫓다 영혼이 탈출할 것 같은 그 순간에 남편이 들어오고, 그것이 매일 이어진다면? 너는 너의 일을 하는데, 나는 우리가 함께 낳은 아이를 기르느라 내 젊음과 내 시간을 몽땅 바치고 있어, 하게 되는 것 아닐까? 너는 너의 삶을 사는데 내 삶은 대체 어디로 간 건데, 하는 상대적 박탈감. 그것이 쌓이고 쌓이는 것이다.


맞벌이를 하고 있는 부부가 시댁에 간다면? 음식을 준비하는 건 여자의 몫이라 생각하는 어른들이 많기에 당연한 듯 아내는 부엌으로 불려 들어가고 남편은 소파에 앉게 되지 않을까? 그럼 아내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말을 하게 되겠지. '너는 누워서 쉬는 동안, 나는 부엌일만 했잖아'하는 문장이 완성되는 것이다. 남편이 그 상황을 불편해하고 어떤 식으로든 해결하려 한다면 어느 정도 선에서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당연하다 여겨 버릴 때, 아내의 마음엔 박탈감이 한 올 피어나는 것이다.


뭐.... 짧은 내 생각엔 그랬다.




나는 그 상대적 박탈감이 매일매일 마음에 쌓였던 것 같다. 나는 음식하고 차리고 치우고 청소를 시작했는데 밥먹고 침대에 누워 있는 저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나는 애 등원준비하면서 출근준비까지 하느라 숨이 넘어가는데 아직 잠들어 있는 저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런 문장들이 수도 없이 완성되어져 갔다. "나는 ~하는데, 너는 왜 안 해."


결혼 초기, 나는 꽤나 여러번 저 문장을 사용해 대화를 시도했다. "나는 ~하는데, 너는 왜 안해", "이건 함께 해야 하는 일이야", "나도 힘들어" 등등.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었다. 나와 상대가 원하는 것이 같은 방향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일단 쉬고 싶은 사람과 할 일들을 끝내고 쉬고 싶은 사람의 대화는 합의점을 쉽게 찾지 못했었다. 싸움을 줄이려 그냥 내가 하고 말자 하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선택 과정에서 느낀 무력감과 자포자기의 느낌은 고스란히 내 속에 쌓였었다. 남편은 우리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말을 안하니 그는 몰랐고, 나는 모를 리가 없다고 그가 외면하는 것이라 꾸준히 생각했었다.


인생은 뒤돌아 볼 때 비로소 이해되지만
우리는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 키에르 케고르





그리고 꼭 덧붙이고 싶은 말. 나는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런 선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 그 자체가 지닌 장점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겪었던 이야기들을 나열해 두고 보니, 마치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거대한 결론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아 덧붙이고 싶었다. 결혼을 통해 가정을 꾸리면, 친구와 연인 등 그 어떤 관계에서도 얻지 못하는 '안정감'을 느끼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물론 상대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결혼 후 첫 생일, 시어머니가 미역국을 직접 끓여 주셨었다.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던 나는, 직접 끓여준 미역국을 생일에 먹어본 기억이 까마득했다. 나를 위해 누군가가 끓여준 미역국은, 놀라울 만큼 따뜻했고, 심장을 두근거리게 할 만큼 따스했다. 지금도 나는 그 온기를 기억하고 있다. 그 날의 밥상을 기억한다. 나를 가족이라 여기시는구나 생각했던 그 순간들은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다.


그리고 나는 남편이 아이와 함께 놀아주던 그 순간 역시 기억하고 있다. 집 안에 퍼지는 아이의 웃음소리에, 내 마음 속에 있던 얼음 덩어리들이 순식간에 녹아 없어져 버리는 것 같았던 그때의 기분 역시 또렷이 기억한다. 나, 당신, 아이. 우리는 가족이구나 했던, '내 가족'이구나 했던, 그 순간들을 여전히 기억한다. 애써 외면하고는 있지만, 분명히 그 순간들에는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꼈었다.

이젠 다시 오지 못할, 과거의 일이 되어버려 안타까울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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