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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날엔 Nov 19. 2020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결혼 이야기-함께 살아간다는 것은(6)

모니카 벨루치 주연(알렉스 역)의 영화 '돌이킬 수 없는'(2002)에 나오는 대사다.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알렉스는 연인과 '가볍게' 다툼을 벌이고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하보도에서 성폭행을 당한다. 화면을 보고 있기 힘들 만큼 영화는 오랜 시간 롱테이크로 성폭행 장면을 보여주는데, 그 장면에서 눈을 돌릴 수 없는 이유는('야해서'라기 보다는) 힘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무력감과 공포, 충격 등 모든 감정이 관객에게 전달되어 오기 때문이다. 그 이후 화면은, 다툼도 성폭행도 일어나기 이전 상황으로 넘어가고 연인의 아름다운 행복한 한때가 화면에 가득 찬다. 그리고 모니카 벨루치는 말한다.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고.

영화 '돌이킬 수 없는'. 네이버에서 퍼왔습니다만, 문제되면 지울게요.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는 말보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말이 더 익숙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생활은 '시간이 모든 것을 파괴한다'는 쪽에 더 가까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힘들어져만 갔다.

아이는 자라 어린이집을 거쳐 유치원에 다녔다. 직장을 다니다 사업을 시작한 남편의 생활은 평범한 내가 감당하기에 버거운 것이었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던 결혼 당시 생각 그대로 어떻게든 가정은 유지되고 있었으나 그 안에서 나는 서서히 망가져 가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기억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오래 전부터 우리 부부는 대화라 할 만할 것을 나누지 않게 됐다. 회사 일정으로 인한 육아 문제, 가족 모임에 대한 논의 등 꼭 필요한 대화들만 나눴다. 정해진 출퇴근 외의 시간에 아이는 내가 맡았고, 회사 워크숍 등 비정기적인 일정이 생기면 걱정부터 올라왔다. '남편에게 뭐라고 말하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 정도의 대화도 망설이는 상태였다. 나눌 '필요'가 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회사에 있는 동안 남편에게 전화가 오면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무슨 일이지, 내가 뭘 잘못했나, 화가 났으면 어쩌지.


나는 그저 주어진 일들을 쳐 내며 살아갔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출근 준비를 마친 후에는 아이를 깨워 등원 준비를 하고, 출근길에 아이를 유치원 버스에 태우고 직장으로 향했다. 퇴근을 하며 장을 봐서 저녁을 차리고 아이와 놀아주다 재웠다. 무한반복.

남편이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는 알 지도 못했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저 아이를 무사히 하원시키고 내가 퇴근할 때까지 잘 데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즈음 내가 남편에게 바란 것은 딱 한 가지였다. 그저 싸움이 일어나지 않기를, 나를 공격하지 않기를, 그것만을 바랐다. 남편이 나를 때린 적은 없었으나, 내 성격이 문제인 것인지 나는 남편이 그저 무서웠다. 피하고 싶었다. 갑자기 화를 내며 언성을 높이는 일이 잦았고, 결혼 생활 내내 당신의 화가 무섭다고 이야기했었다. 남편은 나를 배려해 화를 줄였고, '대화'라는 방법으로 본인의 의견을 전달해 왔다. 1~2시간씩 이어지는 '대화'는 버티기 힘든 것이었다. 차라리 때렸으면 하고 바란 적이 있을 만큼 괴로웠다. "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이 대화를 좀 끝내면 안될까?" 우리의 대화는 이런 방식이었다. 별다른 '사건'없이 하루가 평온하게 끝나기를. 내가 바란 것은 이 한 가지였다.


이런 마음을 품은 상태로 남편을 다정하게 대할 리 없었다. 몇 년의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나는 내 의견을 피력하는 것에 대한 의지 자체를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어차피 변하지 않지, 어차피 내 말 안 듣잖아, 어차피. 어차피.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아버린 채 생활하고 있었다. 언제 나가든, 새벽 5~6시에 귀가를 하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편이 무언가를 물으면 "응, 괜찮아"라고 긍정의 대답을 했다. "오늘 나가도 되?", "명절에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되겠어?" 응. 무조건 예스. 그래야 말을 길게 섞지 않을 수 있다 생각했고, 싸우지 않을 수 있다 생각했다. 남편이 집에 없는 시간이 너무나 편했다.




당시의 우리는 행성 같았다. 좁은 집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빙빙 도는 행성들. 나는 남편이 다가오면 한 발짝 뒤로 물러났고, 남편도 나의 무표정과 무관심을 보지 않으려 애쓰며 지냈다.


어쩌면 나는 비겁했던 것일 수도 있다. 용기를 내, 물건을 부수든 소리를 지르든 내 의사를 피력하고 상대의 행동을 바꾸려 노력해야 했었다. 결혼 초부터 싸움이 잦았고 계속 되는 싸움에 지쳤고 아이 앞에서 싸우지 않으려면 입을 다무는 편이 낫겠다고 혼자 결론 내리고 입을 다물었다. 싸울만큼 싸우고 또 싸우고, 그렇게 불 태울 기력이나 의지가 나에게 있었다면 우리의 미래는 달라졌을까.


하루하루를 그저 살아낸 날들이었다. 월급을 받아도 순식간에 사라졌고 집안일은 늘 쌓여있었다. 분 단위로 계획을 세워두고 쳐내고 쳐내고 있었지만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늘 쫓기는 기분. 차라리 회사가 좋았다. 아침 출근시간이 24시간 중 가장 좋았다. 반면 퇴근길에는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말을 참고, 화나는 감정을 참고, 그렇게 참고 참고 또 참으면 웬만한 일에는 초연해지는 상태가 됨을 이 무렵 알게 되었다. 감정을 느끼면 스스로가 버티기 힘들어지므로 갖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 자체를 지우려 애썼다. 기계처럼 주어진 일들을 쳐내며 사는 것이 편했고, 그렇게 살아가려 애썼다. 남편이 무엇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그러려니~" 하고 넘겼고, 한 발 떨어져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려니" 하며 모든 일들을 바라보기 시작하자 하루를 보내는 것은 확실히 편해졌다. 하지만 동시에 삶에 대한 의욕이 점차 사라져갔다. "그러려니~" 뒤에는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하는 생각이 불쑥 치솟았던 것이다.


그런 날들이었다. 결혼할 당시 생각한대로 어떻게든 굴러가고 있는 결혼생활.

내가 참을 수 있는 데까지 참는 한 이 가정은 유지될 것이다. 아이가 속한 가정. 아이를 보며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다신 결혼하지 않을 것 같다.
누군가와 그렇게 가까이 살면서도 투명인간으로 남긴 싫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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