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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날엔 Nov 19. 2020

진외가를 아시나요

결혼 이야기-함께 살아간다는 것은(5)

아이가 태어난 지 5~6개월이 흘렀을 때 시어머니 부모님의 제사가 있었다. 아이는 어렸고 출산 휴가 복직 후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라 일상에 지쳐있어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권유에 못이겨 따라나섰다. 거실에 가득 모인 사람들. 사람들을 보자마자 아이는 울어댔다. 아이를 받아든 어머님은 아이를 달래며

"옛날에는 할머니 친정을 진외가라고 불렀어. 여기가 진외가야”라는 말씀을 하셨다.

생활에 지쳐 잔뜩 비뚤어진 마음을 품고 있던 당시의 나는 귀로 흘러드는 그 말을 듣고 어머님을 빤히 쳐다봤었다. 이곳이 진짜 외가라는 건, 우리집은 가짜 외가라는 걸까? 어머님의 말씀에 함께 웃는 사람들 틈에서 부글부글 속을 끓이면서도 단 한마디도 따져 묻질 못했다.


입을 딱 붙인 채 음식을 차리고 치우고 일을 했다. 아이는 끊임없이 울었고 나도 아이처럼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진짜 외가에 오신 손님들을 위해 일하는 가짜 외가의 사람. 아, 가짜 외가 사람이라 내가 일을 하는구나.

움직이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티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었다.




왜, 그토록 솔직하지 못했던 걸까. 하루쯤은 미친년에 빙의돼 막말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미친년까지는 못 되더라도 “어머! 그럼 저희집은 가짜 외가네요”라고 거슬리는 말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화기애애한 그 분위기를 깨기가 싫어 입을 닫는 쪽을 택했다.


나의 선택은 늘 그런 식이었다. 상대가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하면 악다구니를 쓰고 싸우고 내 의견을 내세워야 했지만 싸우느니 피했고, 상종하지 않겠다며 입을 닫는 쪽이었다. 전투력으로 사람들을 분류한다면 나는 전투력이 '상실된' 인간 쪽에 속했다.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그런 사람 곁에는 가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다.


돌아보면, 결혼 생활 동안 나는 늘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조리원 퇴원 직후, 앞으로의 복직과 육아, 생활비를 걱정하는 내게 어머님은

“여자가 일을 계속하니 남자가 생활력이 없어지는 거야”라는 말씀을 하셨었다.

회사 일을 하며 집안일 대부분을 하고 있었고 그 상황에 출산을 한 며느리에게, 나의 직업이 당신 아들의 생활력을 없애는 이유가 된다는 청천벽력같은 결론을 내려주신 것이다. 아아, 아들의 문제가 아니라 내 직장이 문제였던 것이다.

 

언제였던가. (시)가족의 식사자리. 음식을 차리느라 식구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에야 뒤늦게 식탁에 앉은 내게 어머님은 불판에 몇 점 남은 고기를 모아 주시며 “옛날에는 며느리가 상에 앉으면, 고기같은 게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넌 참 시집 잘왔다”는 말씀을 하셨었다. 며느리는 딸이고, 이제 우리 모두 식구라더니 왜 같이 먹지 않고 남은 걸 먹어야 하는 건지 궁금했었다. 아무도 먹지 않아 남은 고기를 먹으면서도 '아, 난 참 시집을 잘 왔구나! 아이, 행복해!'하지 못하는 내가 이상한 것인지 의아했다. 남편의 말대로, 내가 '똥페미'라 어른의 말씀을 꼬아서 듣게 되는 것일까.


친정 아버지가 쓰러지셔서 응급실로 실려가신 그날 밤, 응급실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와 앞으로의 육아와 간호를 걱정하는 내게는 “요즘은 요양병원도 참 잘 되어 있다더라”는 말씀을 하셨었다. 어머님의 친구의 아버지가 치매에 걸리셔서 요양병원에 계시다면서. 내 아버지는 아직 60대셨고, 병명조차 나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보통은 회복을 바라는 것이 평범한 인사가 아닐까요, 어머님. 눈물이 핑 돌았지만 그저 입을 다물었다.


몇 년이 흘러도 또렷이 기억 날만큼 상처가 된 말들이었다. 그 순간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스스로를 바보같다 여긴 기억들이다. 목구멍으로 수많은 말이 올라왔음에도 입을 떼지 못했다. 단 한 문장도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한 것이다.





무수리병? 하녀병? 며느리병? .... 혹은 벙어리병?

무엇이라 불러야 할 지는 고민되지만, 확실히 병이라 이름 붙일 만한 '이상 증상'이 내게 있었다. 기본적으로 시댁 식구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들이 모이면 당연한 듯 돌봄노동 종사자가 되었다. 심지어 어머님이 설거지는 두라고 하셔도 나중에 뭐라고 하실지도 모른다며 하겠다고 기를 썼다.

결혼 초기 시댁에 다녀오면 늘 배가 고팠다. 무엇을 먹은 것인지, 제대로 입에 넣은 것이 있기는 했던 것인지 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밥을 먹지 못하는 식사자리라니. 억울했지만, 그럼에도 비슷한 상황이 주어지면 또 그런 행동을 꾸준히 반복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나는 점점 더 궁금해졌다. 나는 여자이니까, 이것은 여자의 일이니까 해야하는 것일까?  나도 가정의 수입원인데, 그럼 남자의 역할은 무엇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일을 하지 않고 있으면 마음이 불편했다. 이런 무수리병은 내 어디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일까. 나는 전생에 진정 무수리였던 것은 아닐까.


요즘은 생각한다.

내 어머니의,  

혹은 어머니의 어머니의,  

혹은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가

배우고 가르치고 몸으로 실천한 삶의 조각들이 전해지고 전해지고 전해져 내 의사와 상관없이 내게도 내려온 것 같다고. 어머니들의 고생. 그것들을 몹시도 거부하면서도, 성장과정 어딘가에서 체득해 스스로도 알지 못한 깊숙한 곳에 새겨놓았던 것은 아닐까. 시대가 정신없이 변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어딘가에서 새겨진 그 행동양식은 끊임없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스스로 힘들어 하면서도 나는 움직였다.




어른의 행동양식은 바뀌기 어렵다고 생각했었다. 나보다 곱절을 더 살아온 어른들이므로, 나에게 익숙한 사고와 생활을 그들에게 강요할 순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겐 그들 나름의 생활양식이 있을 테니까.

그래서 남편을 괴롭혔다. 어머님이 자신의 사고 방식대로 집안일에 적극적이지 않은 아들을 키워냈고, 그 아들을 남편으로 둔 나는, 아들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 스스로는 어른 앞이라고 입을 꼭 다물면서도, 남편에게는 한동안 짜증을 부렸었다. 당연히, 그것은, 수많은 싸움들의 이유가 됐었다.


결혼하지 않았다면 절대 몰랐을 내 정체.

나는 '무수리병' 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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