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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날엔 Nov 27. 2020

창과 방패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담이 끝난 건 2021년 11월. 2022년이 시작됐지만 어디에서도 연락은 없었다. ‘소송’이라는 단어조차 잊고 지내던 즈음,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으나 받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역시나 상대는 “가정법원 가사조사관 ○○○입니다”하고 말을 시작했다. 남편과 나의 가사조사를 진행한 분은 아니었다. 법원에 인사이동이 있었고, 담당자가 바뀌었다는 짤막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녀는 관련 내용을 모두 충분히 검토한 후에 전화한 것이니 편하게 말씀하시면 된다고 덧붙였다. ‘편하게’는 참 좋은 단어지만, 안타깝게도 그 ‘편하게’가 잘 되지 않았다. 가사조사관 앞에서 울고불고한 기억이 있는데, 그 모든 것을 본 적 없는 사람이 ‘편하게’라고 말을 해 봤자 크게 와닿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온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상담 후기를 묻는 것, 다른 하나는 상담의 ‘기적 같은’ 효과로 혹시나 내 결심에 변화가 있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나는, 상담은 매우 만족스러웠으며 나와 남편의 문제들을 돌아볼 수 있었고, 미래까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상담사님께 감사드린다. 그럼에도 나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더 확고해졌다. 나는 이혼을 해야 잘 살 수 있다. 이제야 안정을 찾아가는 내 삶이 만족스럽다는 후기를 전했다.행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며 나를 회유하면 어쩌나, 싶었지만 가사조사관은 ‘충분히 알았으며 법원에서 다시 연락이 갈 거’라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앞으로의 상황에 관해 설명해주길 기대했지만 그런 건 없었다.





2022년 3월 둘째 주에 첫 조정기일이 잡혔다. 상담을 끝내고 4개월이 지나서야 다음 절차가 시작되고 있었다. 조정기일은 화요일 오후 4시. 연차를 낼 수 없는 날이었다. 변호사 사무실에서는 원고(나) 없이 첫 조정을 진행해 보겠다고 답했다. 조정에는 본인이 꼭 참석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조금 의아했지만, 변호사 사무실에서 괜찮다고 하니 그러려니 생각하고 말았다. 


나는 이 조정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었다. 내가 아는 조정은, 이혼에 대한 의사가 ‘합의’ 된 후에 양육권이나 위자료, 양육비 등 실질적인 ‘조건’들을 조율하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여전히 합의점을 찾지 못한 상황에서 이 조정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여하튼 1차 조정은 내가 참석하지 못한 채 진행됐고, 조정이 끝난 후에 변호사 사무실에서 연락이 왔다. 담당 판사가 다음 조정 때는 원고와 피고, 두 당사자가 반드시 참석하기를 요청했다고, 2주 후로 잡힌 2차 조정기일에 참석이 가능한지를 물어왔다. 다행히 수요일 오후 2시였기에 반차를 쓰면 될 것 같았다. 


소송 기간 2년, 이날 처음으로 판사라는 높은 분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4~5평 남짓한 조정실. 그곳에는 50~60대로 보이는 남녀 조정위원 각 1명과 피고와 피고의 변호사, 원고와 원고의 변호사, 그리고 판사까지 7명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코로나 상황이었으므로, 각자의 자리에는 투명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보이는 것은 직사각형 테이블. 상석(?)이라 부를 수 있는 가장 정면의 자리는 당연히 판사님의 것이었다. 판사석 오른쪽으로는 원고 측 그러니까 나와 변호사님이 앉았고, 판사석 왼쪽으로 조정위원 두 분이 앉았고, 판사석 맞은편 자리에는 피고 측인 남편과 남편의 변호사가 자리했다. 


담당 변호사에게 전해 들었던 1차 조정의 분위기는 내게 호의적인 것이었다. 조정위원들은 1차 조정에서 남편에게 이혼을 ‘강력히’ 권했다고 하셨다. 아내의 고통이 이해된다, 지금 이혼을 받아들이는 게 아내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다, 등등. ‘피고 측에 상당히 불리한 분위기였다’고 1차 조정 분위기를 전해 들은 나는, 그 분위기가 2차에서도 이어질 것이라 속단하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예상과 달랐던 시작은 판사의 발언부터였다.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 판사는, 내게 1차 조정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를 물으며 “양측이 이혼 의사가 다른 경우에는 기일 하나하나가 굉장히 소중하기 때문에, 꼭 참석해 주시길 바랍니다.”하고 말했다. 시작도 하기 전에 꾸중(?)을 들은 것 같아 작은 목소리로 “네, 알겠습니다”하고 답했다. 


판사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두 분은 잘 모르시겠지만, 수만 건의 이혼 사건 중에 두 분 같은 경우가 굉장히 드뭅니다. 면접 교섭도 잘 이뤄지고 있고 양육비 지급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어요. 모범적이라는 단어를 써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이의 상처가 최소화되도록 두 분이 굉장히 모범적으로 잘하고 계세요. 그래서 더 판결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판결을 하든 두 분 모두 항소할 것으로 보이고, 섣부른 판결이 지금의 이 관계를 깨버리는 계기가 될까 봐 굉장히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만족할 만한 조정을 이뤄내시는 게 가장 좋은 해결책 같아 보입니다.”


이 말을 끝으로 판사는 사라졌고, 조정위원 둘이 전체 진행을 이끌어 갔다. 예상보다 더 적극적인 분들이었다. 그놈의 도박, 외도, 폭행, 그 세 가지가 없는 결혼생활의 경우 쉽게 종지부를 찍을 수 없다는 것이 그들 입장이었다. 그들이 묘사하는 나는 참을성이 부족하고 정서가 불안정한 인간이었고, 이혼만을 고집하는 내 태도는 ‘아이 미래도 생각하지 않는 몰상식한 엄마’의 것이었다. 어떻게 말을 저렇게 쉽게 하나, 일부러 화를 돋우는 건가 싶을 정도로 정말 이상한 논리를 그들은 펼쳐냈다. 불안정한 인간, 몰상식한 엄마가 되지 않으려면 그들이 내미는 조정안을 받아들이라는 식의 논리에는 한숨만 나왔다.


판사에게 전달될 내 인상까지 생각하느라 차분하게 말하려 애써왔지만, 결국엔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조정 결렬할게요. 더 이상의 조정은 불필요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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