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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날엔 Nov 27. 2020

(11) 힘을 내서 사는 게 아주 버겁지만, 그래도-

이제 우리, 이 관계를 정리하자(5)

'자녀양육교육'에 참석했다. 이혼하는 부부에게 미성년자녀가 있다면 양쪽 모두 반드시 들어야 한다는 그 교육. 이혼 과정을 검색하며 계속 봤었던 그 교육에 내가 참석하게 된 것이다. 

가장 신기했던 건 미리 신청할 필요도 없이 원하는 날을 골라 그냥 참석하면 된다는 것. 매주 화요일 동일한 시각에 가정법원에서는 꾸준히 교육을 열고, 본인이 원하는 날짜가 있으면 그냥 가서 스-윽 앉으면 되는 방식이라고 했다. 매주 교육이 열린다니? 누가 얼마나 올 지, 아무도 안 올 지도 모르는 교육을 매주 진행하는 시스템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진심으로 의아했다. 남편과 그 교육에서 마주치는 것이 내가 생각한 최악의 시나리오였으므로, 최대한 빨리 다녀오는 것이 만남의 가능성을 줄이는 방법이라 판단했다. 


자녀양육교육 전날, 우습게도 나는 '뭘 입고 가지'라는 중대한 고민을 한참 동안이나 했다. '이혼녀'라는 신분(?)으로 처음 참석하는 공식적인 자리랄까, 그런 큰 행사를 맞이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원고의 입장이며, 이혼을 '당할 만한' 일을 하지 않았으며, 경황없이 참석한 것이 아니라 차분히 준비 중에 이 자리에 왔으며, 슬프지도 불쌍하지도 않으면서, 중대한 자리에 어울리게 격식을 갖추면서, 지나치게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고, 아이를 잘 챙기는 이미지를 주면서도,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옷차림.... 그런 옷이 있을 리가 없었기에 '눈에 띄지 않을' 무난한 옷을 골라 입고 갔다. 





"절대로 울지 않을테다" 다짐하면서도 휴지를 가방에 챙겨 넣고 정해진 교육장소로 향했다. 70~80여 명 정도의 인원으로 가득찰 만한, 딱히 넓지도 딱히 좁지도 않은 공간에서 교육이 진행됐고 20~30여 명 정도의 딱 적당하다 느껴지는 인원들이 그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신기할 만큼 적당하네, 하는 것이 교육에 대한 첫 번째 느낌이었다. 미리 신청을 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적당한 인원이 올 수 있었을까, 참 신기했다. 30~50대 정도(?)의 다양한 연령의 남녀가 강의실을 채우고 있었다. 그곳은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벽하게 지켜지는 공간이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의자 2~3개씩을 사이에 두고 띄엄띄엄 앉은 사람들은 마스크를 쓴 채로 앞만을 바라봤다. 눈인사나 사소한 질문조차 옆사람에게는 절대로 하지 않는, 절대적 거리 두기의 공간이 그곳에 있었다. 교육 내내 곳곳에서 들리는 한숨과 훌쩍임. 다들 힘든 시간을 지나가고 있었다. 나 역시 한숨을 쉬고 훌쩍였지만...


나는 솔직히, 교육장소 입장 때부터 안심하는 마음이 컸었다. 교육을 듣는 것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그 곳에 있는 모두에게 동질감 혹은 동료애와 비슷한 감정마저 느꼈다. 가까운 사람 중 아무도 이혼한 사람이 없었다. 건너건너건너 누가 이혼했다더라 하는 이야기는 간혹 들려왔지만, 직접 겪은 사람이 내 주변엔 없었다. 교육장소에 들어가 사람들을 보면서, 이 고통을 겪어내고 있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님을 느꼈고, 그 사실 자체에 많은 위안을 받았다. 세상에. 남의 고통을 보고 안도하고 안심하다니. 정말 엉망이었다. 




“이혼 후유증”

나는 이 말을 자녀양육교육 중에 처음 들었다. 교통사고에나 쓰는 말인 줄 알았는데 이혼 후유증이라니, 참 적절한 표현이었다. 사랑했고 한 공간에 살았고 내 아이의 아빠인 사람과의 이별을 결정하는 내내, 나는 아팠다. 괜찮은 척 해야 했고, 처절하게 무너져 아파하기엔 살아가야 했다. 내가 느끼는 엄청난 감정들은 나 혼자만 겪고 있는 것이므로 이 일을 겪지 않은 다른 사람 앞에서는 괜찮다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모두 안으로 안으로 삭혀야 한다는 다짐들. 


하지만 모두가 겪는 증상이며, 그것을 '후유증'이라 부른다는 말을 듣는 순간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 교통사고 당한 사람도 아프면 아프다고 하잖아, 나는 이혼 후유증을 겪고 있구나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제는 괜찮다가 오늘은 화가 나고, 또 어떤 날은 이유없는 불안에 덜덜 떨어도,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이혼 후 겪을 수 있는 ‘당연한’ 증상이구나 하는 안도감. 


“이혼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부부 중심의 가족 관계가 종료되고 자녀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안정되게 잘 살아야 자녀를 살릴 수 있는 겁니다.”


인간은 역시, 배워야 하는 존재였다. 교육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알찼고, 아이에 대한 죄책감에 몸부림 치던 내게 새로운 방향을 보여줬다. 자녀 중심의 새로운 가족이라니.

당장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이 교육을 꼭 들으라고 간절히 말하고 싶었지만....... 겨우 참았다. 




자녀양육교육을 받은 날은, 별거를 위해 이사를 한 지 딱 1년 하고도 하루가 된 날이었다. 1년+1일째. 자녀양육교육 전날 준비를 하며, 오늘이 이사 1년째구나 하며 새삼스러워 했었다. 1년 전의 나는 별거를 감행했고, 1년 후의 나는 이혼을 준비하고 있구나. 결국 어쩔 수 없는 것이었나, 하며 만감이 교차했었다. 


이런저런 기분을 다스리려 법원 벤치에 앉아 하늘을 바라봤다. 가을 하늘은 참 서글프게 맑았다. 좋겠다, 너는 맑아서. 하긴 너도 잔뜩 흐릴 때도 있지. 비를 뿌릴 때도 있잖아. 매일 오늘처럼 맑지는 않잖아. 등등 헛생각을 하고 있는데 폰이 울렸다. 브런치에서 알람이 와 있었다. '와, 또 떨어졌구나. 대단한 하루야' 라고 생각했는데 문득 '음? 떨어질 땐 알람이 안 왔던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브런치 작가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참 드라마같은 타이밍이었다. 이야기를 지어내려 해도, 억지스럽다며 넣지 않았을 그런 타이밍. 

'에?' 하며 브런치 앱을 여니, 작가 등록 이전에는 누르고 싶어도 누를 수 없었던 '발행' 버튼이 활성화 되어 있었다. 오호라- 이렇게 올리는 건가? 하며, 작가의 서랍에 잔뜩 쌓아뒀던 글 중 하나를 발행해 봤다. 누가 볼 지 안 볼 지 모르지만(지금도 역시 누가 보는지 안 보는지 모르지만), 일단 올려봤다. 와, 신기했다. 홀로 앉아 있다가,  맑디맑은 허공을 향해 공을 쏘아 올리는 그런 기분이었다. 난 일단 던진다? 어디로 갈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발사한다?! 


이혼을 위해 자녀양육교육을 듣고, 가정법원 벤치에 앉아, 브런치 첫 글을 발행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었다. 잔뜩 말라버려 서걱서걱하기만 했던 마음이, 잠시 목을 축이는 것 같았다. 

그래, 브런치도 이 타이밍에 날 위로해주잖아. 

괜찮아. 괜찮을 거야. 조금만 더 버텨보자. 


인생은 정말, 살아봐도 모르겠다. 앞으로 또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나는 모를 뿐이다. 그저 "끝" 할 때까지 살아내야 하는 것. 어떻게 살아내야 할 지는 각자의 몫인 것 같다. 


다만, 나는 굳게 다짐하고 있다. 다시는 나의 슬픔과 불행을 모른 척 하지 않겠다고.

'너만 참으면 다 괜찮다'며 나를 외면하지 않겠다고. 스스로를 돌보며 남은 날들을 살아가겠노라 마음 먹었다. 

하늘이 화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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