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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날엔 Dec 07. 2020

(12) 아이의 생일이 다가왔다

이제 우리, 이 관계를 정리하자(6)

평온한 날들이었다. '더 이상 질질 끌지 않을테다!' 라는 마음으로, 길고 긴 고민 끝에 '날린' 이혼 소장은 천지개벽은 커녕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한 채 여전히 공중에 떠 있었다. 소장을 전달하기 위한 우편배달부의 3차례 방문은 '폐문부재'라는 방패에 막혀 실패했다. 평일 저녁이나 주말, 그러니까 집에 사람이 있을 법한 시간에 맞춰 법원 인력이 직접 배송간다는 특별송달 역시 '폐문부재'라는 방패를 뚫지 못했다. 답답했다. 


4차산업혁명 시대에 걸맞게 혁신적으로, 카톡이나 문자로 소장을 보내면 안되나요, 카톡에 '1'이 없어지면 소장이 전달된 걸로 간주하면 안되나요, 제가 직접 전달하면 안되나요 등등을 외쳐봤지만, 엄중한 법 절차는 나의 소소한 요구들을 들어주지 않았다. 변호사님은 기다려달라고 했고, 기다리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어서 일상을 살았다. 그럼에도, 싸움이 없는 평온한 일상이었고 일상이 주는 편안함을 만끽하며 지냈다.


하지만, 아이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 명절만큼, 아니 명절보다 더 중요해진 아이의 생일. 그 날이 성큼성큼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고 가까워질수록 나는 불안해졌다. 올해는 어쩌지. '이혼 소송 중에 아이의 생일을 보내는 방법' 같은 건 자녀양육교육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문제였다. 연락이 오면 뭐라고 하지, 같이 만나자고 하면 어떡하지, 나 편하자고 애 생일에 아빠를 못 만나게 할 수도 없지 않나 등등 많은 고민들이 나를 괴롭혔다.


별거 직후였던 지난해 아이의 생일에는 남편과 아이와 나, 이렇게 셋이 모여 어색하게 파티를 했었다. 별거를 시작했지만 이혼에 대한 '확고한' 결심은 서지 않은 때였고, 엄마와만 보내는 생일이 아이에게 쓸쓸한 느낌으로 기억될까봐 불안했다. 그래서 같이 밥을 먹으며 파티를 하자는 남편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었다. 엄청난 고민과 검색 끝에 생각해 낸 해결책이 '뷔페'였다. 음식을 핑계로 마주 앉은 테이블을 떠날 수 있는 곳. 어색한 침묵을 채워줄 적절한 소음이 있는 곳. 그곳에서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남편이 음식을 뜨는 동안 빠르게 빠르게 접시를 비웠다. 남편이 테이블로 돌아오면 나는 음식을 가지러 갔다. 천천히 천천히 고르고 고르며 남편이 일어날 시간을 짐작했다. 그리고 남편이 일어날 느낌일 때 다가가 테이블에 앉았다. 남편이 돌아오기 전까지 또 빠르게 접시를 비웠다. 배가 불러 더이상 음식이 들어가지 않아도 기웃기웃 음식 사이를 돌며 신중하게 음식을 날랐다. 음식쓰레기를 줄이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지만... 테이블 위로 흘러 넘치는 어색함을 최대한 피하는 것도 당시의 나에겐 중요한 일이었다. 음식을 다 먹을 때쯤엔 케이크를 꺼냈고, 훌륭한 직원분들이 다가와 노래를 불러주셨고 사진도 찍어주셨다. 어쨌거나, 그렇게, 생일 파티라는 大 미션을 끝냈었다. 




올해 생일은 이혼을 결심한 후였으므로 더 고민이 깊었다. 시끌벅적하게 아이의 친구들이라도 부르고 싶었지만, 코로나 시국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에게는 '절친'이라고 할 만한 친구가 없었다. 내 친구의 아들(엄친아=엄마 친구 아들)이 유일한 또래 친구였으므로 고민 끝에 친구에게 부탁을 했다.

"친구야! 제발! 같이! 여행 가 줄래!!"

친구는 너그럽게 흔쾌히 천사처럼 구세주처럼 여행 제안을 수락해줬고, 친구의 아이까지 함께 하는 여행이었으므로 쓸쓸하지 않은 생일파티가 될 것 같았다. 일요일이 아이 생일이었지만 금-토로 여행 일정을 잡았다. 생일 당일은 아빠와의 시간을 보내게 해 주고 싶었다. 나는 일상을 함께 하지만, 자주 못 만나는 아빠와의 시간이 아이에게 더 특별할 것 같았다. 


생일을 일주일쯤 앞뒀을 때 전화가 왔다. 시어머님이었다. 받기 불편했지만, 받아야 했다. 이혼을 결심하면서 마음 먹은 것 중 하나가, 아이의 '관계'에 문제가 생길 만한 행동은 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나는 시댁과 '남'이 되길 선택한 사람이지만, 내 선택이 아이가 맺고 있는 관계에 너무 많은 영향을 끼치지 않기를 바랐다. 아이의 할머니, 아이의 할아버지, 아이의 삼촌.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든 변화가 생길 테지만, 지금 당장 그 모두를 가차 없이 끊어내는 것은 내 욕심일 뿐이라는 판단이었다. 


날씨 등으로 일상적 대화를 이어가시던 어머님은 "아이 생일에 점심을 함께 먹자"고 말씀하셨다. 함께? '함께'의 의미가 잘 이해되지 않아 되물었다. "저도요?" 

1초의 망설임도 없는, "그래"라는 대답을 들었을 땐 오히려 내가 버벅거렸다. "제가요? 아니, 제가 왜.. 거기를."

같이 밥 한끼 먹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말라고 거듭거듭 말씀하셨지만, 거듭거듭 거절했다. 그럼에도 거듭되는 요청에 지친 나는 예의를 접고 솔직히 말해 버렸다. 

"큰 의미를 두지 않고 가볍게 생각해도, 제가 불편한 자리는 거절할 수 있는 것 같은데요."

그리고 혹시나, 내가 쏘아올린 소장에 대해 전혀 모르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더 솔직히 말해 버렸다. 

"저 이혼 소장 보냈어요. 아이 아빠가 계속 안 받고 있는 상황이에요."

소장을 이야기하자, 어머님은 더 이상 식사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셨다. 




서둘러 전화를 끊으시면 좋겠다는 내 기대와는 달리, 어머님은 새로운 제안을 내미셨다. 현재 상황에 대해 시아버님을 '직접 만나' 말씀 드리는 것이 예의에 맞다는 이야기였다. "당신의 아들과 이혼소송을 하려 합니다"라는 내용을, 시부모님을 만나서 설명해야 한다고?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거듭거듭거듭 거절했다. 아이의 아빠와 이야기를 나누시라, 저는 들을 이야기도 드릴 이야기도 없는 것 같다 등등 꽤나 '싸가지 없게' 거절했지만, 같은 이야기가 반복됐다. 

"결혼 전에 허락해 달라고 어른들께 인사를 드렸으면, 이혼을 결심할 때도 마찬가지다", "며느리로 받아들인 것은 딸로 받아 들인 것이다. 그런 마음을 모른 척 하면 안 되는 거다" 등등. 

고구마 백 개쯤을 숨도 쉬지 않고 먹은 상태로 잘 달궈진 맥반석 위에 누워 있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나는, 고구마 먹은 맥반석 오징어. 

온몸을 배배 꼬아봐도 뜨거운 불길을 벗어날 수가 없네. 

뜨겁네. 거 참 따갑네. 거 참 답답하네. 목도 막히고 속도 뜨겁고 죽겠네. 와우!

대체 언제쯤 이런 대화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을까. 엄마가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오랜만에 들었다. 


거듭 요청과 거듭 거절이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극적 타결. 아이의 생일 전에 아버님께 전화를 드리기로, 전화를 드려 직접 '이혼'에 대해 말씀드리기로 했다. 미루고 미루다 전화를 걸었다. 

"어머님이 아버님께 전화 드리라고 계~~~속 말씀하셔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하고 나름은 선공을 펼쳤다. 하지만 "니가 먼저 걸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고? 억지로 전화를 한 거네" 같은 역공에는 더 이상 떠오르는 말이 없어서 닥치고 듣기로 했다. "너의 선택을 방해할 생각은 없다. 어느 정도 그 이유가 이해가 되기도 한다", "애는 앞으로 평생 상처를 받고 살게 될 거다", "아이를 할아버지인 내가 데려와 시골에서 키우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 "너보고 평생 수절하라고 할 마음 없다. 니 미래에 아이가 짐이 될 수도 있다" 등등.....

머리가 지끈 거렸다. 나는- 고구마 먹은- 맥반석 오징어라네-...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별거 이후.. 아이의 생일, 크리스마스(... 다가온다), 명절 등등이 다가올 때마다 나는 내 선택이 정말 옳았나 하는 고민을 깊게깊게 하곤 했다. 아이가 시끌벅적하게 그 날들을 보낼 수 있으면 좋을텐데, 시끌벅적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와 단둘이 있는 상황에 어떤 '적막함'을 느끼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는 부질없는 바람들을 품곤 했었다. 아빠-엄마-아이, 이런 안정된 가족과 함께 보내는 특별한 날들을 아이에게서 영영 빼앗아 버린 것 같은 죄책감도 느꼈다. 

그 모든 바람과 죄책감 사이에서 쩔쩔매다 맞은 아이의 생일. 이런 저런 일들을 겪으며 나는 드디어 가뿐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내 선택은 옳았다. 철저히 내 삶을 놓고 봤을 때 내 선택은 여러 모로 옳았다. 

그리고 다짐한다. 먼훗날 다시 뒤돌아보았을 때에도, 지금의 이 선택이 옳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살아내고 말리라. 내 삶으로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다. 이 선택이 정말 최선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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