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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날엔 Dec 08. 2020

(2) 다 쓴 샴푸병으로 부자가 될 가능성을 점쳐봅니다

샴푸 용기는 보통 두 가지였다. 펌핑형이거나 통형이거나.(다른 형태도 있었던가..?) 가득 들었을 때는 별 문제가 없지만, 다 써 갈 때는 한 방울이라도 더 짜내 보려 애를 썼다. 펌핑형일 경우 펌핑 손잡이를 마구 눌렀다. 푸슝푸슝 소리가 나다가 꽥하는 느낌이 들면서 '옛다 이게 마지막이다' 하며 점액질 덩어리를 뱉어내면, 굳이 힘을 줘 펌핑이 달린 뚜껑을 열고 병을 뒤집어 손바닥에 탁탁 쳐댔다. 통형은 일단 뚜껑을 닫고 시작했다. 마개가 있는 쪽으로 뒤집어 쿵쿵 뒷부분을 치다가 옆부분을 치다가 하면, '에잇, 더러워서 뱉는다' 하는 느낌으로 점액질 덩어리가 손으로 떨어졌다. "찾아서 나오면 10원에 한 대"라고 외치는 깡패가 된 느낌으로, 죄 없는 병들을 털어댔다. 


돌아가신 엄마는 그런 난리부르스를 해결하는 방법을 알려주셨었다. 다 써 가는 샴푸병의 뚜껑을 열고 쪼르르 물을 붓고, 앞 뒤 왼쪽 오른쪽으로 마구 흔들어줬다. 그러면 용기 바닥부터 벽면에 붙은 샴푸까지 물에 씻겨졌고, 꽤 농도 짙지만 물기는 많은 샴푸가 완성됐다. 그대로 머리카락에 대고 펌핑하면 끝. 다 죽어가던 샴푸를 소생시켜, 한 두 번쯤은 더 일을 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엄마 말을 지독히도 안 들었지만, 이 방법만은 처음 듣는 순간부터 그대로 잘 따랐다. 어른의 지혜구나, 다들 이렇게 사는구나,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남의 집에 가서 샴푸통을 흔들어 보며 "어라, 이 집에서도 막판엔 물을 담는군" 하며 확인할 길이 없었기에 정말로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결혼을 하고서야 알게 됐다. 다들 그렇게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머리를 감으려니 샴푸가 죽어가고 있었다. 그 샴푸병의 뚜껑을 열고 물을 담아 흔들었고, 내 머리를 다 감고도 좀 남기에 그 병을 그대로 뒀었다. 하필 남편이 그 샴푸로 머리를 감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나 다음 순서에 머리를 감게 될 사람, 나 아니면 남편이었겠지만 내 머리가 더 길었고 내가 더 자주 머리를 감았었다. 욕실에서 머리를 털고 나오던 남편이 물었다. 

"샴푸에 물이 흥건한데 왜 그런 거야?"

"음? 다 써 가길래 물 부어서 흔들어서 썼는데?"

정말, 나는 몰랐다.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그게 무슨 궁상이야. 물 섞인 샴푸가 어떻게 제 기능을 해."

음....? 거품만 나면 제 기능을 한 게 아닌가? 

"티끌 모아 봤자 티끌이야. 이런 거 좀 아끼지 마."

궁상떠는 와이프로 전락한 나는 당황했다. 평생 한 두 방울씩 꾸준히 모으면 죽기 전에 한 병은 모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평생을 들여 샴푸 한 병을 모은다 해도 그게 무슨 큰 의미가 있나 싶기도 했다. 

아, 역시. 티끌은 모아봤자 티끌이군. 명언이었다. 


샴푸 덕분에 엄마가 떠올랐던 나는 엄마에게 저 말을 꼭 전해주고 싶었다. 

"엄마, 티끌은 모아봤자 티끌이래. 엄마도 궁상 그만 떨어."

어린 시절부터 엄마에게 그런 걸 아껴서 뭐하냐는 말을 참 많이도 했었다. 잘 안 나오는 모나미 볼펜을 엄마는 버리지 않았다. 몽당연필이 생기면 그 모나미 볼펜을 가져와 심은 버리고 거기에 몽당연필을 끼워서 쓰게 했다. 선물 받은 포장지나 리본은 잘 접어서 보관해 재활용했고, 구멍 난 양말은 기우고 또 기웠다. 바늘에 실을 꿰어주며, 이런 걸 아껴서 부자 되겠냐는 말을 여러 번 했었다. 


궁상맞은 모녀의 삶을 돌아보건대, 티끌은 모아봤자 티끌이라는 말이 어느 정도는 맞는 것 같다. 샴푸 몇 방울, 구멍 난 양말, 몽당연필 같은 걸 그렇게 아껴댔어도 엄마는 평생 부자로 살지 못했다. 정반대였다. 병원비에도 전전긍긍하시다가 병을 늦게 발견했고, 일찍 돌아가셨다. 내 경우도 크게 다르진 않다. 저 먼바다에 용왕님이 살고 계셔-라는 느낌으로 부자들이 존재한다. '언젠가는 나도 용왕이 될 수 있을 거야!' 하는 꿈은 아직도 꾸고 있지만, 일단 용궁에 들어갈 방법부터 찾아야 할 것 같다. 




그러다 문득 아이를 봤다. 엄마는 나에게 '샴푸병 소생술'을 잘 알려 주셨지만, 내 아이에게는 이 비법을 알려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티끌들을 모으며 살다 보니, 티끌에 연연하게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커피값을 아끼려 스타벅스 앞을 못 본 체 지나가다, 에라이 하며 들어간 그 어느 날 나는 깨달았다. 4000원 아끼려다 4000원 만큼의 행복을 놓쳤구나. 순간의 '행복감'과 비교할 때 4000원은 큰돈일까 작은 돈일까. 매일 쌓이면 커지겠지만, 가끔씩은 4000원짜리 행복을 '죄의식'없이 누려도 되지 않을까. 


티끌에 집착하는 것은 절약일까 아닐까. 티끌을 바라보며 살다 보니 찌꺼기만 남은 것들도 버리지 못하고 계속 곁에 뒀고, 어느 순간 주변을 보니 찌꺼기들만 한 가득이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것들을 껴안고 살 텐가, 하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가 한심했다. 찌꺼기만 남아있는 냉장고 속 반찬통들도 버리고, 마음속 찌꺼기들도 모조리 비우고. 요즘은 그렇게 사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볍게. 가볍게. 


부디 내 아이는 티끌보다 태산을 보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티끌은 티끌이니 신경도 쓰지 말고, 태산 같은 것들만 마음에 담고 태산 같은 것들만 꿈꾸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사소한 것들을 가득 끌어안은 채 전전긍긍하지 말고 태산같이 살면 좋겠다. 


아이가 20살쯤 되면 물어봐야겠다. 너, 샴푸 다 써 갈 때 어떻게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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