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무엇인가?

교통사고가 났고, 디스크가 파열되었으며, 오후 반차를 썼습니다

by ANDTAX

종종 아내와 자기 직전에 이야기하는 주제는 '행복한가?'입니다


아내나 저나 아주 아름답지만은 않은 청소년기를 보내다 보니, 과거 이야기는 늘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배경에 따라 저는 막연히 '더 행복해지자'라는 꿈을 꾸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저는 '더' '행복'해지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불우한 가정환경 등은 저에게 고통을 인내할 힘을 키우게 해 주었습니다. 더 큰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열매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고, 가시나무 위를 기어 올라가 열매를 딸 수 있게도 되었습니다. 물론 그 열매가 항상 맛있는 것도 아니었고, 몸에 난 상처와 바꿀 정도가 아닐 때도 많았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짝사랑하던 친구와 연애를 시작했을 때에는, 정작 그 친구를 짝사랑했고 고백했지만 마음을 받아주지 않던 동안 받은 상처를 그 친구에게 돌려주기 바빴던 것 같습니다. 그 친구가 저를 사랑하는 마음이 제가 그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될 때쯤 저는 이별을 고했고, 그렇게 아름답지 않은 연애를 종료한 기억도 있습니다


628660071_PZNURHTS_8e27a795c57f6c0f33ee7b05b5461ca0e2968f86.png 교제를 성공한 순간이 굉장히 높은 이유는 저는 모릅니다


좋은 직업을 위해서 간 로스쿨, 대학원, 그리고 변호사가 되고서도 오랜 기간 동안 박봉의 시간으로 보낸 시간들은 제가 변호사로 얻은 명성을 다 깎아먹어도 남을 만큼 경제적으로 힘들게 하였습니다.


무리한 학자금도 대출해 가고, 변호사의 품위유지를 위해서 했던 과소비, 현학적 만족을 위한 박사과정, 자격증학원, 그리고 언젠가 고위공무원이 될 수도 있다고 하며 참아온 공무원 생활들은 지금 지나고 보면 무엇을 위한 인내였는지도 헷갈리는 시간들입니다.


과연 제가 고통을 참아내면서, 더 얻으려고 했던 그 보이지 않는 행복은 뭐였을까요?




스크린샷 2025-05-25 223519.png '해피'는 15위이다

저는 행복이 단순히 어떠한 기분이나 인식 정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쾌감이나 도파민, 엔도르핀이 나온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저의 삶에 대한 관점은 불행을 벗어나는 것이고 저를 불행하게 하는 원인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행복해지는 '상대적 행복론' 내지는 '불행소거론'에 가까운 행복론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관점에서는 불행한 기분이 드는 빈도가 줄어들수록 행복에 가까운데, 반대로 어떤 일이 생겼을 때도 이것이 행복한 감정이 드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스크린샷 2025-05-25 223621.png 운수 좋은 날은 행복날인 것이다
스크린샷 2025-05-25 224228.png 불행은 행복의 반대지만, 행복의 부재가 불행은 아닌 것이다

저는 한동안 남들이 '언제 행복하다고 생각해?'라는 말을 들어도 그 상대에 따라 대답이 달라졌습니다. 상대가 연인이라면 '지금(너와 함께한 순간)?'이라고 하지만, 제 삶을 이야기해야 하는 순간이나 의사와의 대화라면


불행한 감정이 들지 않도록 싸워온 순간들을 이야기하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현재도 모른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그런 진지한 대화를 하게 된 사람은 거의 없고, 아내와도 결혼 이후에 하게 된 진지한 대화주제 중에 손꼽는 주제였습니다.




아내의 '행복'의 관점은 저보다는 조금 더 고차원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둘 다 '불행에서 벗어나는 것'이 행복의 시작이라는 것에는 동의하나, 저는 '불행 자체는 삶에서 배제할 수는 없으니 그것을 해결하고 불행한 기분이 드는 빈도가 줄어드는 것'그 자체를 행복으로 생각하였으나, 아내는 '불행에서 벗어나고, 진정으로 행복한 기분이 드는 일이 일어나거나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는 관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반문은 굉장히 감성적 이게도 '그럼 지금은 안 행복해?'였는데, 이른바 쌉T인 제 와이프는 '지금은 좋지, 하지만 이게 행복인지는 모르겠어'라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쌉T인 저는 거기에 대해서 서운함보다 찾아온 생각은 '나야말로 행복이 어떤 것인지 정의 내리지 못하고 살고 있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행복도 비교가능한 객관적 수치가 있다면 그나마 객관적인 방법은 도파민, 엔도르핀 등의 호르몬을 확인해 볼 수는 있겠습니다. 다만 우리는 처음 느낀 그 행복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기 어렵고, 동일한 경험은 처음의 경험보다 크기는 어려운 것이 보통입니다. 우리가 종종 듣는 마약류는 같은 효과를 얻으려면 점점 양을 늘려야 한다고 하듯이, 더 강한 자극, 더 강한 고양감이 없다면 '어제보다 더 나은 행복'같은 것을 추구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인간의 뇌는 자극에 대해서 적응하게 만들어 뇌가 같은 자극에도 무뎌지도록 만들어졌다고 하나, 우리는 그러한 무뎌짐을 이겨내기(?) 위하여 더 많은 자극을 우리에게 노출시킵니다. 처음 우리가 먹은 불량식품, 단 음료, 첫사랑의 행복 등은 이제 고급 스테이크와 와인, 미녀와의 잠자리로도 충족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헌법 제10조, 권리 중에 가장 먼저 규정되어 있다.

제가 종종 간과하는 것은 실제 사용하는 단어가 법률상에서 크게 인상 깊지 않다면, 실제 용어도 그렇게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변호사로서 헌법을 배웠고, 대한민국헌법 제10조에서 행복추구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법기술적으로 헌법 제10조가 직접적 효과를 보지 못하고 보충적 효과를 보는 경우가 많아 이를 간과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헌법은 권리와 의무를 같은 장에서 규정하고 있는데, 자세한 이론은 생략하고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나의 국민으로서의 권리는 국가가 보장하는 것이지만, 타인과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도록 의무를 부여하거나 조절하게 하게끔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어쩌면 제가 '타인의 행복을 침해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게 아닐까?' 하는 소극적 행복론을 갖게끔 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즉 대한민국헌법의 행복추구권은 '일반적인 행동의 자유'라고만 불리고 있으므로, 내가 자유로는 행동을 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그만인 권리라고만 치부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 이름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라는 것인데 말입니다.


... 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that they are endowed by their Creator with certain unalienable Rights, that among these are 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
우리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며 창조주에 의해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의 추구라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미국의 행복추구권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권리로 인정하였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권리라 삭제했다는 중론도 있으나, 저 the Pursuit of Happiness라는 단어는 너무나 멋지게 들립니다.



불교에서의 행복론은 사실 저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합니다. 불교의 행복은 고통의 인식에서 시작해 욕망과 집착을 비우고, 타인과의 연결 속에서 지금 이 순간을 자각하며 얻는 고요한 평온을 말한다고 합니다. 즉 내 고통을 인식한 다음, 이에 대한 욕망과 집착을 비우면, 그 이후에 찾아오는 열반과 같은 평온이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고통을 해소하고자 하는 마음가짐 또한 어쩌면 고통을 유발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삶 자체가 고통인 것을 인정하고, 이로 인한 나의 인식을 바꾸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기독교의 행복론은 돈이나 성공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마음이 바뀌어 평안과 사랑의 삶을 사는 데서 온다고 말합니다. 교회의 교리는 결국 인간의 행복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그것이 '삶의 진리'이며, 반대로 거짓 쾌락을 좇는 모든 것은 인간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그러한 결과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여 사후에 지옥에 간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천국에서의 행복한 시간을 위하여 현생의 고통을 참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 것은 제가 교회를 다녔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우선 우리도 다 알다시피 예수님 또한 인간을 위해서 구세주로 왔다가 100% 스스로 납득은 못한 상태에서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일이 있었고,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신이 사이코패스가 아니냐는 질문에 자주 등장하는 욥(욥: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 때문에 극심한 고난을 겪은 인물로, 재산을 잃고 가족을 잃고, 몸에 병이 들었음) 또한 고난을 이겨낸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성경 속 인물이 고통을 이겨내고 끝내 행복을 찾는 이야기를 보면서, 저 또한 불행을 인내하는 것이 행복에 다가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201802260027815.jpg 너무나 잔인하지만 신앙심 고취를 위하여 미성년자들에게 노출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저는 아내의 행복을 위해서 더 노력하여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삶 속에서 더 큰 자극에 기쁨을 느끼는 성격이기도 하나, 그것을 행복에 결부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아내는 크고 작은 즐거움은 느끼나, 아직 삶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지는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럴 때마다 이야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선 작은 삶의 목표를 적고 이뤄보자. 그러고도 행복함을 못 느끼면 더 큰 목표를 적고 이뤄보자. 그리고 그다음엔 더 큰 거, 다른 거, 더 재미난 거, 더 어려운 거, 다양한 것을 생각해 보고 이뤄보자. 다 이룰 때까지 우리는 행복이 뭔지는 모르지만 찾아보자. 이러면 행복할지, 저러면 행복할지. 10개, 100개 다 써보자. 그리고 하나씩 해보자. 부족하면 1,000개, 10,000개든 해보자.


저는 아내와 살며 저의 불행을 해소해 가고 있습니다. 아내를 통해서 해소되는 불행도 있고, 아내와 살면서 성장한 제가 이겨내서 해소한 불행도 있습니다. 저의 꿈이 그런 걸 알지만 함께 살아갈 아내와 그리고 언젠가 태어날 자녀가 힘들걸 생각해 보면 너무 불행할 것 같다는 아내의 말은 제가 공무원으로 승진에 목매달지 않고 과감히 사직하게 했으며, 우유부단한 제가 방황하며 고통받을 동안 저에게 항상 기준점이 되어주어 방향을 찾게 해 준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그만큼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고 있는지는 안타깝게도 저는 잘 모릅니다.



지난달 교통사고가 났고, 요추 디스크 2, 3, 4, 5번이 파열되어 신경을 누르고 있습니다. 겨우겨우 앉아서 글을 쓰면서, 더 몸이 건강할 때 더 많은 것을 해볼걸, 더 크게 사고 나지 않아서 다행인 것을, 물 마시고 밥 먹는 것조차도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비명을 지르는 상황을 보면서 몸 하나 건사한 것도 정말 큰 행복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동안 고통은 사실이 아니라 감정이고 인식으로 해소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해온 제가 부끄러울 만큼 사무실이건 집에서건 '악!', '악!' 거리며 다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은 사라지지는 않지만, 고통을 느끼는 통증의 정도는 줄어들 것이라고 합니다. 치료는 되지 않지만 몸이 고통에 익숙해진다는 것입니다. 행복 또한 그럴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행복은 너무나 작고 소중해서 알아차리기도 어렵지만, 그만큼 우리에게 도파민을 뿜게 해주지는 못합니다.


어쩌면, '지금' 행복하다는 인식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가장 빠른 지름길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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