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우리의 '처음처럼' 다가오는
예전 진로를 고민하면서 썼던 글이 있습니다
https://brunch.co.kr/@andtax1003/4
당시에 마지막 엔딩멘트는 "사장님, 여기 진로 한병 주세요!"였으나 기고하는 장소가 법조신문이었기에 그런 멘트로 마무리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 글을 쓸 때만 해도 국세청에서 3년 차 근무할 시절입니다. 저는 지금 회사에 2023. 4.부터 근무하였으니 이제 지금 회사에서도 3년 차 근무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딱 3년을 접어둘 무렵, 저도 그렇고 다들 방황을 하고 고민을 하는가 봅니다.
어렸을 적 보통의 남자아이들이 커가듯, 저는 로봇을 보고 곤충을 보며 자랐고 그러한 경험은 저를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장래희망에는 로봇들을 거느리며 전진하는 저의 모습이 있었고, 평화로운 우주에 어떠한 외계인이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이 상황에서 중력도 이기지 못하고 연비도 엄청 구릴 것 같은 직립보행 로봇을 한두 대가 아니라 여러 기체로 몰고 다니는 모습이 어찌하여 과학자의 모습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습니다.
그러한 꿈은 저를 로봇장난감보다는 여러 과학대회에 나가는 것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마우스 클릭소리가 어렸을 적부터 시끄러웠던 저는 리모컨 버튼은 조용한데 왜 마우스 버튼은 딸깍 소리를 내도록 만들었는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아버지는 고장 난 리모컨을 분해해서 원리를 알려주셨고, 마우스도 하나 분해해서 원리를 알려주셨습니다. 내구성은 모르겠고, 저는 무소음마우스를 만들면 정숙하게 컴퓨터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로 무소음 마우스를 발명대회에 출품하기로 했습니다. 다만 너무 조용하면 클릭이 잘 되었는지 자체를 모르니, 인간의 상하 시야각을 계산해서 클릭하면 마우스 아래에서 빛이 나오게 했고, 고개를 특별히 숙이지 않아도 빛이 나서 마우스 클릭을 인지할 정도로만 한 것입니다.
놀랍게도 현재 무소음마우스는 개발되어 필요한 상황에 따라 잘 팔리고 있는데, 대신 조용한 대신 너무 번쩍거리는 마우스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 이후로 친환경 소재로 분진을 만들어 작동하는 분진폭발 내연기관을 이야기했다가 "효율이 안 나지 않겠느냐"는 말을 듣고 개발을 접었고, 그 이후로 뭔가 특별히 개발을 해보려는 생각은 해보지 못하였습니다.
과학자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은 제가 실제 과학자는 생각보다 더 엄격하고 신중한 직업이라는 점을 알게 되고 난 이후였던 것 같습니다. 사춘기가 강하게 온 저에게는 학교가 너무나 큰 갈등의 요소였고, 좋은 선생님과 나쁜 선생님(이라기보단 잘 안 맞는 선생님) 들을 보면서 더 좋은 선생님이 더 좋은 학교를 만들고 더 좋은 학생을 만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GTO라던가 하는 선생님 관련 일본만화가 많았습니다. 열혈로 학생을 대하면 결국에는 아이들은 성장하고 교사는 희생한다는 그러한 활극이 유행하였으며, 그러한 활극은 마치 지금 제 눈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선생님들이 연금만 바라며 사는 한심한 공무원으로만 보이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고민은 여러 피해자를 만들어 냈는데, 가장 만만해(?) 보였던 음악선생님에게 음악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라던가, 교회에서 음악교사나 음대를 지망하는 친구에게 실기를 가장 덜 봐서 나도 음악교사 지원한다고도 하는 등 성적으로 적당히 갈 수 있는 직업으로만 폄하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은 오히려 대학교를 진학한 다음, 실제로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하면서 얼마나 저의 말과 마음이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었는지 알게 되면서 후회로 남게 되었습니다.
과학자도 교사도 포기한 제가 선택한 진로는 처음에는 의사입니다. 당시에도 만화에 빠져 살던 저는 다양한 의료만화를 보았고, 그러한 의료만화는 단순히 의사가 좋은 직업이라는 점보다는, 사람은 너무나도 쉽게 다치고 죽으며, 그러한 죽음은 적절한 치료가 없으면 돌이킬 수 없다는 불안감을 갖게 하였습니다. 내 주변에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돌이킬 수 없다는 그러한 생각은 저를 의사가 되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의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러한 마음에 저는 의사가 너무나 되고 싶지만 그만큼 공부를 하지 않는(?) 아이들 무리를 알게 되었고, 그러한 아이들은 마치 지금의 오타쿠처럼 의료나 미생물학, 면역학 같은 공부를 하면서 의사의 꿈을 키워갔습니다. 한 명은 과학만 성적이 유별나게 좋고(특히 생물학) 나머지 국어나 사회가 너무나도 좋지 않아, 저에게 '나는 독일로 유학을 가려고 해. 독일 의대를 나와서 의사가 되면 더 좋지 않을까? 너도 관심 있으면 같이 준비하자'라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러한 말은 저에게도 너무나 달콤한 말이어서, 가장 처음 필요한 서류를 물어보니 '재산증명서' 뭐 비슷한 서류였습니다. 독일에 가서 불법체류자가 되지 않을 만큼 돈이 많이 있고 학비를 다 내고도 남을 재산이 있다는 증명서인데, 당연히 20년 가까이 사업을 하며 벌이가 전무하다 싶은 아버지는 너무나 화를 내며 '내가 그런 돈이 어딨'냐고 말을 했고, 저 또한 '부모는 꿈만 바라지 무슨 도움을 주느냐 자식에게 꿈을 강요할 자격도 없다'는 말로 싸우게 되었습니다.
운 좋게도 나쁘게도 당시에는 의대가 거의 사라지고 의전원으로의 도입이 매우 심화된 상태였습니다. 의전원 도입체계로 의대가 있었던 학교들은 의전원 입학을 위한 특수학과를 만들어냈고, 저 또한 그러한 특수학과를 노려서 대입에 성공하였습니다. 남들은 1-2년 준비하는 적성시험이라는 시험을 일주일 학원을 다녀서 붙었으니, 나름 운이 매우 좋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의대에는 못 갔지만 의사가 될 것이라는 희망찬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모인 친구들은 마치 의사가 될 것 마냥 실험실 가운만 입어도 너무나 행복해했고, 실험용 메스만 들어도 마치 의사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저 또한 의사라는 꿈 앞으로 전진하였다고 생각했으나, 마음속에는 위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내가 의사가 정말 되고 싶은가?'라는 답을 내리지 못한 것입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같은 숭고한 맹세를 지킬 수 있느냐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에 저는 답을 내리지 못하고, 다시금 대학교에서도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님 모두의 반대 또는 지원이 없는 상태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기에 넉넉하게 학교를 다니지도 못하였습니다. 개판으로 번역된 번역책을 사거나 보이지도 않게 복사된 제본책을 보며 다녔고, 결국 주식이나 동아리활동에 빠져 제대로 된 학교생활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던 와중 공인중개사 공부를 시작한 어머니를 보고, 민법강의를 듣게 되었는데 마침 생각보다 법이 재미있었던 것입니다. 그 길로 저는 법학과를 부전공하게 되었습니다.
법학과를 부전공하며 군대도 가지 않은 저는 처음에는 변리사수험을 준비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난했기에 중고 책을 다수 사서 인터넷 강의도 겨우 들어가며 공부했고, 1차 시험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입영통지서가 날아오고 저는 결국 사법시험을 봐야겠다는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시공부를 하면 군대도 미룰 수 있고 합격만 한다면 인생도 펼 것이고 군대도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법시험은 한국에서 최고로 어려운 시험이었고, 저는 이제 막 법책을 펴본 초짜라는 것입니다.
법학부에 교수님을 찾아가서, 변리사수험을 할지, 사법시험을 볼지, 로스쿨을 갈지 고민 중이라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다 좋은 진로인데 로스쿨을 강하게 권장하였습니다. 같은 학교 로스쿨에 지원하고, 법학을 전공했지만 법학이 주전공이 아는 사람만큼 유리한 사람이 없다고도 하셨습니다. 그 교수님을 로스쿨 입시면접 때 면접관으로 다시 뵈면서, 저는 운명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이해가 가지 않으면 다음 진도로 넘어가지 않았기에, 저는 학부도 로스쿨에서도 너무나 고생을 했습니다. 중고등학생도 아니고 왜 그러한 결론이 나오는지 납득하지 못하고 암기만 하는 것이 과연 학문이냐는 갈등만 가지고 있다가, 어느 순간 쌓여온 갈등과 고민이 해소되는 시기가 왔으니, 약 2년간 같은 내용으로 씨름하며 어느 순간 유레카를 외치며 이해가 가지 않던 것들이 이해가 가고, 판례 뒤에 숨겨져 있던 사람들의 갈등과 싸움과 감정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 법학의 진수를 조금씩 알게 된 것입니다. 어느 순간 저는 남에게 배우면서 커왔으나 이제는 남에게 가르치면서도 공부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그러한 성장을 보시지 못한 많은 로스쿨 교수님들은 '기타나 치던 저 친구가 어떻게 합격했느냐'라고 하였으나, 저는 기타도 치고 시험도 쳐서 결국 합격도 해치고 나아간 것입니다
물론 떨어졌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합격자 발표날 하고 있던 로스쿨 후배들의 과외시간에서 '다음 주부터 연락이 안 되거나 사람이 바뀌면 내가 떨어진 것이다. 떨어진 사람이 이러한 가르침을 주어서는 안 되지 않겠느냐'라고 하였고, 과외가 끝날 무렵 '내 수험번호가 합격자명단에 있는 것 같긴 한데 확실하지 않으니 내가 다시 연락을 주겠다'라고 하고 돌아왔습니다. 합격한 것을 알게 되고 인생은 바닥에서 많이는 나아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기회에서 저에게 어쩌다가 세금을 택하였냐고 합니다. 사실 제가 세금을 공부하겠다고 시작하게 된 가장 강한 계기는 좋아하던 누나가 어느 순간부터 세무직 공무원을 준비한다는 이야기만 막연히 들었던 것입니다. 그 누나를 제가 로스쿨에 입학하고 나서야 우연히 마주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세금공부를 하게 되면 그 누나와의 남녀관계도 더 깊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검찰 공익법무관이 되어서 비로소 만난 누나에게 '나는 세법도 공부하고 판사시험도 보겠다. 조세 판사가 판사 중에서도 가장 잘 나간다더라, 그리고 전관예우도 좋다더라. 그러한 미래를 그리고 있는데, 내가 세법을 공부하겠다고 한 이유가 누나다. 누나가 없었으면 그런 꿈도 없었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말을 했고, 누나는 고맙다고 그 마음 받아주겠다고 했습니다. 화장실을 다녀온 저는 자리에 앉기 전에 자꾸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던 누나가 드디어 누군가와 통화하는 것을 창문 밖으로 보았고, 전화로 그 남자와 '오빠랑은 연애만 하고 결혼은 저와 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 오빠는 저와 그 누나가 함께 술을 마시던 가게에까지 와서 그 누나를 데려갔고, 다시는 전화하지도 만나지도 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금변호사의 꿈은 제가 국세청에 입사할 때까지 오랫동안 유지되었습니다. 검찰청 공익법무관으로 근무하면서 지방국세청 공무원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결국 채용에도 큰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꿈은 위 '진로고민'이라는 고민 끝에 민간경력채용의 꿈을 가지고 행정사무관에 도전했으나, 결국 낙방하고 사기업에 오게 된 것입니다
https://brunch.co.kr/@andtax1003/11
사무관시험에 낙방하면서 담당강사는 저에게 '나라가 인재를 잃었지만 민간이 인재를 얻었다'며 저를 위로했습니다. 저보다는 저의 아내가 더욱 감동받았으며, 저는 다시는 세금을 공부하지 못하고 세금변호사로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기업에 와서도 세금문제는 계속해서 저에게 노크하였으며, 저는 그러한 노크를 여태껏 무시하며 지내왔던 것 같습니다. 사내변호사로, 준법지원인으로 살고 세금은 그냥 할 줄 아는 사람으로만 살겠다고 생각하던 시간이 약 2년이 지나고, 세금을 더욱더 잘하고 세금을 더 잘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할 순간이 왔습니다. 그러한 고민이 있기 전에는 저는 시골에서 상담이나 하며 조그마하게 사무실을 차려서 아등바등 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진로고민이 있었습니다.
변호사 출신 기업인이 늘어나고 법조인 출신 대통령이 계속하여 선출되고 있습니다. 제가 사기업에 올 것도, 세금변호사로 살아가게 될 것도, 변호사가 된 것도, 의전원을 준비했던 것도 모두 다 저의 의지도 있고 상황에서 가장 좋은 선택을 하기도 한 복합적인 요인이 있었습니다.
형들은 저에게 더 이상 진로고민 그만하라고 합니다. 그만 공부하고 배운 거로 먹고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배우고 싶은 게 많고 모르는 게 너무나 많고 더 알고 싶습니다. 상사는 저에게 조직구조론을 배워보라고 합니다. 저는 아직도 그게 무슨 학문인지 모릅니다.
그러니, 일단 차게 식힌 진로 한 병을 가져와야겠습니다.
"사장님, 여기 진로 한병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