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 머릿속에 가장 깊게 박혀 있는 단어를 뽑자면 단언컨대 그것은 바로 책임이다. 내게 의미하는 책임이라는 명사를 설명하기 위해서 나는 나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고 껄끄러운 부모를 기억 속에서 꺼내와야 한다. 어떤 진단서의 기록처럼 상세 내역을 적어낼 수는 없지만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일찍이 그리운 시절을 보내며 나는 삶은 버티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고 그게 벌써 10년도 더 지났다.
혈연이라는 것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훨씬 이상으로 가늘고도 굵은 뿌리들이 찐득하게 엉켜있어서 아등바등 벗어나려 해도 쉽지 않았다. 사실상 벗어난다는 말 자체에 이미 큰 오류가 있다. 나는 나의 근원을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그저 어떤 방식으로든 인정하고 끊어내야 했다. 끊어내야 한다는 표현을 설명하기 위해 잠시 도마뱀을 데려오면, 일부 도마뱀은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위험을 감지하면 자기 꼬리를 자르고 도망간다. 잘라진 꼬리는 홀로 꿈틀꿈틀 포식자의 눈길을 열심히도 사로잡는다. 도마뱀에게 꼬리는 방향 전환을 도울 뿐만 아니라 움직일 수 있는 속도와 범위에도 영향을 미치며 영양분을 저장하는 에너지 저장소이자 짝짓기의 역할까지 하는 아주 중요한 기관이다. 그렇기에 스스로 꼬리를 자른 도마뱀은 꼬리를 재생시키기 위해 아주 많은 노력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안타깝게도 처음 가지고 있던 멋진 꼬리에 미치지 못한다. 꼬리의 색깔이나 크기 형태 등이 볼품없어지고 결국 생존에서 조금씩 뒤쳐지게 된다. 그럼에도 도마뱀은 자신의 꼬리를 스스로 끊어 내여만 한다. 살기 위해서. 중요한 꼬리가 달라졌어도 꾸역꾸역 다시 힘내어 보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과 참 닮았다.
남들이 봤을 때는 그저 유학이었던 나의 두 번의 도피도 (보편적인 의미로서는) 실패로 끝났다. 가장 믿기 싫은 말 중에 하나는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이었지만, 그때의 나는 살 곳을 찾아 어디로든 가야만 했었다. 맞서 싸우지 않으면 겁쟁이라는 놀림을 받고 비겁하다는 손가락질을 받는 것과 별게로 사람은 정말이지 더 이상 싸울 수 없을 때가 있다. 내가 가진 힘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을 때가 있고 무슨 세상 전체를 바꾸자는 대단한 야망도 아닌데 주변의 작은 무언가 조차 마음대로 할 수가 없음을 수십 번 인정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뭐 어쩌겠는가. 그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다.
갑자기 우울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솔직히 나는 몹시 지쳐서 그만하고 싶을 때가 아주 많다. 그런데도 또 아이러니하게 내게는 살아햐만 하는 이유가 분명하다. 바로 내가 책임져야만 하는 생명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집 털복숭이 강아지에게는 내가 온 세상이고 온 우주다. 흉흉한 뉴스 속 강아지와 둘이 살면서 때로 내가 갑자기 무슨 사고가 나서 집에 들어가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스칠 때는 온몸에 소름이 끼치기도 한다. 내가 돌아가지 않으면 내내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할 강아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강아지, 매일 나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이 강아지 때문에 그리고 덕분에 나는 오늘도 살고 있다.
이때 사람들이 더러 오해하는 점이 있다. 강아지는 강아지다 그렇게 의지하면 안 된다 하는 말 따위다. 하지만 이는 내가 내 강아지에게 얼마나 많은 의지를 하는가가 아니다. 오히려 내가 강아지의 삶을 영위하고 있으니 강아지가 내게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게 더 적합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더불어 나 보다 작고 약한 생명에게 나를 의지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책임에서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나와 내 강아지는 강아지 대 사람으로 건강한 관계에 놓여있고 나는 그저 얘를 온전히 잘 책임지고 싶다. 아주 솔직히 우리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하고 싶지 않고 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내가 책임져야 할 대상을 끝까지 책임지는 것, 그걸 해내고 싶고 그게 지금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 참 웃기기도 하다. 그림을 그리고 전시를 하는 삶을 살았던 시간들에는 나는 누군가 나를 어느 공간에 가둬놓고 배식을 하는 것처럼 밥만 쓰윽 밀어 넣어주고 평생 작업을 해라고 하면 행복할 거야 하고 말하던 삶을 살았었다. 나는 그림을 책임질 필요는 없었고 그림은 나에게 책임을 요구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때 내 삶을 버티게 해 준 건 그림이었으니 말이다.
잘 책임지는 것이란 무엇일까?
책임의 사전적 정의는 맡아서 해야 할 임무나 업무, 어떤 일에 관련되어 그 결과에 대하여지는 의무나 부담 또는 그 결과로 받는 제재라고 나와있다. 정의를 읽어보니 더욱 무겁게 느껴지는 단어이다. 나는 내 강아지의 처음을 함께 하지는 못했다. 마른 몸에 잔뜩 엉킨 털로 시골 여기저기를 떠돌다 나에게 왔으니 말이다. 이 강아지의 타임라인의 어느 부분 갑자기 내가 개입했다. 그러니 나는 엔딩이 올 때까지 책임져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고 이는 단순히 편히 쉴 공간을 제공하고 먹이를 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때의 내게 필요했던 보호자의 모습이 되어야 했고 당당히 그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피곤함에 젖어 미안해라는 감정이 몰려올 때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강아지에게는 그 누구보다 멋진 엄마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나름 스스로 뿌듯함을 가져다주는 노력이 가득 들어 있다. 한발 한발 세상에 나아가며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 평생 함께할 든든한 가족이 되어주는 것 그것이 안락사를 앞둔 강아지를 살림과 동시에 내게 부여된 책임이다.
고백하자면, 내 소원은 내 강아지가 무지개다리를 건너면 장례를 잘 치러주고 그다음 날 나도 따라가는 것이다. 나는 내 강아지가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 몇 살인지 모른다. 모든 건 추정할 뿐이다. 타고난 힘이 좋아서 사람들은 아직 아기인가 봐요 하고 오해를 하지만, 얼마 전 도란도란 입양 3주년을 보냈으니 아마도 4살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내 강아지를 처음 안은 날 나는 딱 30년만 나랑 살자라고 말했다.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에 30년을 넘게 산 장수견이 있다는 걸 들은 터였다. 딱 30년 꽉꽉 채워 산다고 하면 27년이 남았고 다 채우지 못하는 건 아직 상상하고 싶지가 않다. 아무튼 언제일지 모르는 미래의 그날은 나도 만족스러웠으면 좋겠다. 이건 단순히 내 강아지가 내 삶의 전부여서가 아니다. 그만큼 지금껏 내 삶은 꽤나 버거웠고 이 생명을 끝내 다 책임졌으면 나에게도 이쯤 하면 됐다, 수고했다 해주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껏 내 삶은 그러했다.
자식 때문에 산다거나 누구 때문에 산다 라는 말들을 처음 들어 본 어렸을 적에는 그 문장을 이해하지 못했고 별로 듣고 싶은 말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구 때문에 산다는 게 말이 돼?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야지 했던 오래전 과거의 나를 돌아보며 반성하게 될지도 모르고 말이다. 오래 살지 않아서 조금은 부끄럽지만 어쨌거나 살다 보니 세상은 절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만만한 것도 없이 매일 똑같은 아침이 찾아왔다. 누구 때문에 산다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사람들은 오히려 위대한 사람들이었다. 아주 똘똘 뭉친 강한 책임감으로 단단한 사람들인 것이다.
나는 책임이라는 단어가 사랑의 또 다른 형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그러고 싶다. 왠지 조금 슬픈 것 같아서. 하지만 책임은 사랑 안에 살며시 스며들어 있는 것 같다. 또 모른다. 이렇게 매일을 살아내다 보면 책임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나 자신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