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탑방에서 바라본 그날 하늘처럼
“큰딸~ 아빠 회사 그만둘까?”
“아빠! 회사에서 대학 등록금도 나오잖아. 회사 그만두면 나 대학 가서 등록금은 어떻게 해?
그냥 회사 계속 다니면 안 돼? “
내가 고등학생 1학년이던 어느 날 아빠의 뜬금없는 질문에 난 아빠 대신 등록금 걱정을 했다. 내 대답에 아빠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셨고 한 달 뒤 아빠는 실직자가 되셨다. IMF가 터진 1997년, 그렇게 아빠는 평생을 일해 오던 은행을 나와야 했다.
아빠의 퇴직금으로 엄마는 프랜차이즈 설명회를 다녀오시더니 새로 생긴 쇼핑몰 식당가에서 돈가스 장사를 시작했다. 차라리 치킨집을 했으면 나았으려나? 세상 물정 모르던 내가 봐도 썰렁한 동네에 있는 썰렁한 쇼핑몰이었다. 결국 얼마 안 가 문을 닫았다. 장사가 안되기도 했지만 쇼핑몰 건물에 문제가 생겨 더 이상 영업을 할 수 없었다. 아빠가 실직하던 당시, 살던 집이 재건축에 들어가 이사비 대출을 받아 전세를 살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대출이자는 높아지고 가게문까지 닫으며 우리는 이사를 갈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은 지방에 내려가 식당을 하기로 하고 나와 여동생은 학교를 마무리하기 위해 살던 곳 근처 옥탑방에서 지내기로 했다.
동생은 고1, 난 20살이던 때였다. 한강이 훤히 보이는 옥탑방에 동생과 둘만 산다는 생각에 그저 신이 났다. 겨울에는 변기 물이 얼고 여름엔 구더기가 기어 다니는 방한칸이었지만. 그곳에서 동생과 나는 학교도 잘 다니고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도 벌면서 2년을 살았다. 부모님과 떨어져 살면서 부모님이 어떻게 지내시는지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다. 그저 잘 지내실 거라 생각했다. 어느 날 집으로 등기 한통이 날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옥탑방으로 날아든 한 장의 종이에는 우리 엄마 이름이 있어야 할 곳에 낯선 이름 세 글자가 쓰여있었다. 가족이 떨어져 살던 그때, 부모님은 경제적인 것뿐 아니라 서로에 대한 마음도 부족한 삶을 살고 계셨다. 낯선 이름의 주인은 부모님 가게에서 일하던 아주머니였다. 엄마 말로는 아빠랑 그렇게 싸우고는 일 못하겠다고 나가는 아주머니를 엄마가 달래서 데려오곤 했었단다. 미운 정이라도 든 것이었을까. 안 맞다고 싸우던 두 사람이 새로운 부부가 된 것이다.
딸들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혼을 한 것도 서운하고 화가 났지만 바로 재혼을 한 아빠가 실망스러웠다. 내가 가장 멋지다고 생각했던 아빠였기에 그 실망감은 더 컸다. 모진 말도 서슴지 않고 내뱉었다. 나를 만나고 돌아서는 아빠의 어깨는 늘 축 쳐져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은 그 아주머니가 아빠 인감을 몰래 가지고 가서 혼인신고를 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부모님이 이혼했다는 것과 아빠가 재혼하신 것은 사실이었으니 훗날 들은 사실관계는 중요하지 않았다.
드라마는 종방이 있지만 현실은 진행형이다.
나와는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던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는 순간, 모든 드라마는 현실이 된다. 그 뒤로도 더 많은 드라마가 있었지만 여전히 우리 가족의 현실은 뿔뿔이 흩어져있다. 부모님께서 이혼했다는 사실은 스무 살이 넘은 나에게도 상처였다. 나와 여동생은 부모님 일을 이야기하거나 함께 운 적이 없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상처를 토해냈다. 길을 가며 딸 둘이 있는 단란한 가정을 볼 때 혼자 울었던 것을 생각하면 동생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
가끔 생각한다. 예전 아빠의 질문에 내가 다른 대답을 했다면 우리 가족의 삶은 조금이라도 바뀌었을까. 돌이킬 수 없는 걸 알면서도 내 잘못이 아님을 알면서도 속절없이 원망스러울 때가 찾아왔다. 다행히도 허공을 향한 원망의 주기가 점차 길어지고 있다. 시간이 지나 부모님도 서로에 대한 미운 마음이 조금 누그러지고 딸의 부탁에 못 이겨 모여 식사를 하고 안부를 묻기도 한다.
많이 힘들고 방황했던 20대가 지나니 힘들었던 경험들은 나의 또 다른 재산이 되었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수학강사인 나는 아이들과 숫자를 나누다 가끔은 삶도 나눈다. 가족 문제로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아이들에게 내 가족 이야기를 해준다. 그럼 아이들도 마음을 편하게 열고 이야기를 한다. 아이들도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에 위로를 받는 순간이 되어준다. 시간은 약이 되어 우리에게 상처도 일상이 되어 준다. 옥탑방 옥상에서 바라본 어느 날의 하늘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