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가지 재앙, 왜 열 가지나 필요했나? 2

나의 바램은 무엇이고, 하나님의 바램은 무엇인가?

by Andy

400년을 이집트에서 살았던 그들이다.

아무리 야곱의 후손이라는 점과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나름 그들의 정체성으로 작용해 구별된 무리로 지냈다 하더라도 400년 동안 보아왔던 이집트의 전통과 그들이 섬겼던 온갖 신들에 익숙해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가운데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의 존재감은 희미해져 갔다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 상황에서 억압과 고통의 노예 된 삶을 살게 된다.

아마도 이것부터가 하나님의 일하심이지 않을까 싶다.

그 어려움에 히브리인들 내부적으로 하나님을 떠나 이집트의 생활과 풍속에 물들어 살고, 더불어 하나님과도 멀어진 자신들의 상태를 인지하고 돌이키려는 자숙과 자정의 움직임도 있었을 것이다.

노예로 지낸 시간이 100여 년이다.

히브리인 중 가장 나이 많은 이들도 거의 모든 생을 노예로 고단한 삶을 살았을 테고, 대부분의 히브리인은 태어나면서부터 노예로 태어나 전 생애를 힘들게 살아야 했다.

그들은 얼마나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했을까?

그동안 이집트에 동화되어 이집트의 신을 따르며 살던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또 회개하며 구원하시기를 바라고 또 바랬겠다 싶다.


더구나 그들이 다시 비라보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요셉의 하나님 말이다.

그들이 선조들에게 전해 듣고 알고 있는 하나님은 그들의 삶을 복되게 하시겠다 약속하신 하나님, 실제 조상들의 삶을 축복하시고 함께 허시며 어려움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 아닌가?

요셉의 삶을 통해서도 종 된 자리, 죄인 된 자라에서 불러내시고 이집트의 총리로 세우신 것을 다시 기억했을 것이고, 그 일로 인해 자신들의 조상들을 기근에서 구원하셨음도 되짚어 기억하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어 구원을 베푸시길 긴구했을 테다.


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고통스러운 세월을 100여 년 이상, 거의 전 생애를 통해 보내고 있는 히브리인들의 처지에서 자신들을 구원할 마지막 희망 같은 존재였을 하나님의 침묵은 조상들을 통해 전해 듣고 기대했던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점차 내려놓고 더 나아가 자신들의 정체성에서 하나님을 지워가기에 적절한 이유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소망도 바람도 희미해지다 못해 낙심과 절망이 그들 모두를 뒤덮고 있을 그때 모세가 등장해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한다.


그렇게 거의 사그라들었던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소망의 불씨가 다시 피어난다.

그리고 그 불씨는 모세의 기적 한 번에 풀무질당한 것처럼 타올랐다 파라오의 완악함에 사그라들기를 반복한다.


앞서 했던 질문을 다시 던져본다.

‘왜 하나님은 한 번에 결판을 내지 않으셨을까?‘

왜 하나님의 구원이 간절한 이들에게 소망을 품게 하셨다가 절망케 하시기를 반복하셨는가 말이다.


성경에 이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런 질문을 하게 된 것도 하나님이 내 삶을 이끄시는 데 있어 속 시원하게 해결해 주심이 아니라 될 듯 말듯한 지지 부단한 과정 속에 머물게 하시는 것을 겪는 중에 10가지 재앙을 바라보는 히브리 인들도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답은 ‘해결될 듯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 이루어질 듯 이루어지지 않는 바람 들은 나를 어디로 인도하며 무엇으로 만들어가는가?’에 대한 답변이 될 것 같다.


문제가 해결되고 바라는 것이 이루어졌음에도 우리는 이내 같은 문제를 마주하고 같은 바람을 갖게 된다.

왜 그럴까?

현상만 해결됐을 뿐, 그 문제의 근원은 해결은 고사하고 무엇인지 파악도 안 됐기 때문이다.

때문에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문제는 해결 받지만 문제는 반복되고 그리고 그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는 삶, 그런 모습,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일까?

성장하고 발전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고, 창조하신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언제까지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일까?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으시긴 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랜 시간 신음하던 문제들이 계속되는 것과, 해결될 듯 말 듯 애를 태우던 시간들이 지속되는 가운데 결국엔 나를 돌아보게 되고, 문제의 근원이 나였음을 생각하게 되고 마침내 그렇게 알게 되고 마주하게 된 나를 바꾸어내야 하는 것이 해결책임을 깨닫게 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본다면 문제 앞에 간절함으로 해결해 주시길 바라고 기도는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민함이 없고 행함이 없는 나를 마주하게 되고 결국 나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하기 원하시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리는 상황을 바꾸어달라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상황이 아닌 나를 바꾸길 바라신다는 것을 그렇게 알게 되더라.

그리고 그렇게 변화된 나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데 사용하시기 위함이리라.


10가지 재앙의 의미도 이와 같지 않을까 싶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단번에 파라오를 굴복시키고 히브리 인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올 수도 있었다.

그렇게 이집트를 탈출하고 나면 히브리인들의 노예 된 상황은 바뀌고 그들의 바람은 이루어지겠지만 그들을 하나님 뜻에 따라 행하는 자들을 만들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길 원하셨던 하나님의 바람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재앙이 10번이나 반복되며 기대함과 낙심이 반복되는 가운데 히브리인들의 공동체 안에서도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을 것이다.

그들의 삶에서 희미해져 갔을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것이고, 가나안 보다 이집트가 좋아 주저앉아 정착하게 된 것, 하나님보다 이집트의 신과 그들의 풍속을 좇아 살던 삶이 이야기되고 자신들이 잘못했음도 자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히브리인들을 고통 중에 구하시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들을 구원해 내는 것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로 만들어 내는 것 까지였다.


때문에 하나님은 ‘단번에’가 아니라 10가지 재앙을 하나하나 실행하시며 히브리인들의 인식 속에 있는 이집트의 신들에 대한 환상을 지우고, 그 반대로 하나님에 대한 존재를 분명하게 인식시키는 계기로 삼으셨다.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재앙, 이집트의 모든 장자들을 죽이시겠다는 이 재앙에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지를 질문하시고 마침내 행함으로 답을 하게 하신다.


10번째 재앙도 그동안 행하셨던 9가지의 재앙들처럼 이집트 각 집들의 처음 난 것들 죽이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마지막 열 번째 장자의 죽음에 대해서 만큼은 미리 말씀하시고 행 할 바도 알려주신다.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양을 취할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양을 취하되 그 어린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사람 수를 따라서 하나를 취하며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에 따라서 너희 어린양을 계산할 것이며, 너희 어린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이 달 열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불사르라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출애굽기 12장 / 1절 ~ 14절)


하나님이 행하라 시키신 일은 고작 양을 잡아 굽고, 누룩이 들어있지 않은 떡과 쓴 나물을 함께 먹는 일이다.

하나 더, 양을 잡을 때 흘린 피를 문설주에 바르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무엇하나 어려운 일들이 아니다. 그냥 하면 될 일 들이다.

하지만 누가 이 일을 할 것인가?


하나님을 믿어 신뢰한 자들일 것이다.

이 쉬운 행동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행동이라는 것이고, 이것에 주목해야 한다.


앞선 9가지의 재앙을 통해서 소망과 절망을 오갔을 것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며 기대했다가도 파라오의 완악함에 낙심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불신이 교차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결심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을 것인지, 믿지 않을 것인지.

그 결심을 ‘고작~’이라 말할 수 있는 그 일을 행함으로 답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다.


노예 된 자리에서 해방되는 것은 히브리 안들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해방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을 신뢰해 행동하는 자들로 만드시길 원하셨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지 이루어지지 않을지 조마조마함에 맘 졸이며 기도만 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것이 감당할 수 없이 크고 어머어마한 일이라 그저 해결해 주시길 기도만 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행동하며 직접 그 일들을 감당하고 해결해 낼 수 있는 사람들로 변화시키길 원하신다.


이번엔 고작 양을 잡고, 누룩이 들어있지 않은 맛없는 딱딱한 빵을 쓴 나물과 먹고,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표시하는 정도지만 하나님은 이를 통해 하나님을 신뢰해 행동하는 자를 찾으셨다.

반면 그렇지 못한 자를 찾아 심판하셨음도 기억해야 한다.


오랜 기도 에도 응답되지 않으며 해결되지 않는 문제 가운데 있는가?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모습은 하나님을 의지해 기도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의지해 행동하는 자리로 나아가길 원하시는 때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그 행함이 없어 문제가 지속돠고 상황이 악화되는 것이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행동하지 않음에 대한 심판일 수도 있겠다.


하나님을 믿어 기도만 하는 자리에 있는가?

하나님을 믿어 행동하는 자리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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