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출자아(自我 / Ego)기!

by Andy

사실 모세와 출애굽의 이야기는 30여 년 신앙생활의 기간 동안 매우 빈번하게 접해 사건들의 시퀀스가 자동으로 떠오를 정도로 너무나 익숙하고, 그 사건들의 의미까지 정리되어 내재된 상태라 새롭게 바라볼 여지가 없겠다 싶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모세를 보며 40년간의 광야 생활에서 모세가 스스로를 어떻게 지켜 왔는지가 느껴져 새삼 연민을 느끼게 됐다.


한동안은 스스로를 한없이 자책했지 싶다.

비록 충동적이지만 동족의 고통에 부당함과 연민, 책임감을 느껴 학대하는 이집트 관리를 때려죽였다.

하지만 이내 사람을 죽인 것이 발각되고 곤경에 처해질 것이 두려워 광야로 도망쳤던 그다.


스스로가 얼마나 못나보였을까?

분연했던 그 순간의 자신은 사라졌고, 두려움에 도망쳐있는 현재의 자신은 얼마나 한심스러웠을까?


광야에서의 40년은 그런 자책과 자기 비하가 아물고 극복된 시기였을까?

여전히 동족의 고난에 분개하고, 다시금 그들을 구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단단해지며, 방법을 강구하며 준비한 시간이었을까?


그렇지 않았더라.


오히려 동족이 있는 이집트로 돌아갈 수 없는 이유를 찾고, 스스로의 능력을 한계 지어 그들을 외면할 핑계들로 내면을 단단히 해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한심스러움에 대해서 스스로를 지켜내고 있을 뿐이었다.


‘어쩔 수 없었어! 나 혼자 막강한 이집트를 어떻게 상대해?’


모세는 어느새 80세가 되었다.

모든 것에 체념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다.

체념한 것들을 긴 세월로 묻어 더 이상은 동족에 대한 그 연민도, 책임감도, 무엇도 없을 시기가 되었던 것 같다.

더구나 100세를 조금 넘겨 사는 것이 그 당시의 평균 수명이었기에 모세도 생이 마감되어 가는 시기에 과거 40대의 혈기 왕성함으로 품었던 생각들은 내려놓고 살지 않았을까 싶다.


모세는 광야에서 미디안 제사장의 딸 십보라와 결혼해 두 아들을 낳는다.

그중 첫째 아들의 이름은 ‘게르솜’,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는 의미다.


모세의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엘리에셀’, ‘도우시는 하나님’이란 의미로 모세는 둘째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이 이집트 파라오의 손에서 자신을 구원하셨음을 언급한다.


그 하나의 이름은 게르솜이라 이는 모세가 이르기를 내가 이방에서 나그네가 되었다 함이요

하나의 이름은 엘리에셀이라 이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셨다 함이더라

(출애굽기 18장 3절 ~ 4절)


첫째 아들의 이름 ‘게르솜’에는 동족의 아픔을 버려두고 떠나 광야에서 혼자된 스스로의 처지에 대한 한탄이 담겨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모세는 동족을 생각하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스로의 처지에 괴로워했던 것 같다.


반면 둘째 아들의 이름 ‘엘리에셀’에는 동족에 대한 마음은 사라지고 그나마 바로의 손에서 도망쳐 살아있는 것에 만족하고 심지어 하나님께 감사하는 모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렇게 동족을 향한 마음을 애써 외면해 결국은 무뎌지고 그저 살아있는 것에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80세의 모세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80세의 모세를 부르신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모세는 그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한다.


그 거부함에서 모세가 40년의 시간 속에 동족을 외면하려 스스로를 얼마큼 부정해 왔는지가 고스란히 보인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출애굽기 3장 10절 ~ 13절)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출애굽기 4장 10절 ~ 13절)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내가 누구이기에~

그동안 동족의 어려움을 외면하며 스스로의 미음과 생각에 쌓아 단단하게 되어버린 할 수 없는 모든 이유의의 총합이다.


나는 본래 말을 잘하지 못하는~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

동족을 고난에서 구하는 일에 그럴듯한 이유가 아닌 고작 말을 잘 못하는 것을 이유로 내세우고 있다.

대단한 능력이 없음은 물론이고 이런 하찮은 능력조차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보다 강력하게 거부할 수 있을까 싶다.


오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그 어떤 이유를 대도 나는 할 수 없다는 강력한 부정이다.


심지어는 자신을 불러 보낸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부정한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지 않은 모세다.

둘째 아들의 이름에서 하나님이 도와 살 수 있었음을 고백했던 그다.

하지만 모세는 40여 년간의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기부정 끝에 하나님마저도 지운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하나님마저 지워야 비로소 완벽하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스로를 만들어 동족의 고통을 외면했다는 자책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야곱의 후손들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시는 과정을 논하기에 앞서 현재를 살아가는 내가 해야 할 일들, 도전해야 할 일들, 일어나 발을 내디뎌야 하는 일들 앞에 이런저런 이유들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가 오버랩된다.

할 수 없는 수많은 이유들, 어쩔 수 없다는 강력한 핑계들을 내세워 그저 그렇게, 그럭저럭 살아가는 현재의 내 모습 말이다.


창세기를 마치고 출애굽기를 시작하기에 굉장히 망설이고 주저함이 컸는데 어쩌면 나의 내면 깊숙이 이런 모세의 모습과 나의 모습을 동일시하고 있었고, 그것을 수면 위로 끄집어내 마주하기 싫었던 이유이지 않을까 생각도 된다.


하나님은 스스로는 할 수 없다는 모세의 그 단단한 이유들을 하나하나 방법을 제시하시며 깨트리신다.
하나님마저 지워버린 모세에게 하나님은 직접 찾아오셨고 모세가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와 방법으로 스스로를 소개하신다.


스스로의 한계와 현실의 문제를 내세워 할 수 없는 이유들에 매몰되어 버리고, 하나님에 대한 소망마저 지워버린 인생은 살아갈 아무런 이유 없는 그저 그런 인생이 될 수밖에 없음을 모세를 통해 확인한다.

하지만 할 수 없는 이유가 아무리 크고 단단해도 하나님은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가 되심을 또한 목격했다.


어쩌면 출애굽기는 이집트의 억압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낸 내용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한계, 현실의 한계 속에서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고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끌어내 하나님이라는 이유로 다시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출애굽기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 부담되어 주저했었는데 그 부담감이 조금은 가벼워지고 기대함도 느껴진다.

keyword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