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의 시작은 야곱의 아들들이 이집트로 이주한 것을 마치 사실관계를 기록하듯 한 명 한 명 이름을 이야기하고, 몇 명인지까지 거론하며 시작한다.
실제적 사건임을 증명해 강조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보인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번성하고 매우 강해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 한다.
아마 야곱의 후손들이 400년을 전부 노예로 살았던 것은 아니라 짐작된다.
그들이 노예로 고통받으며 살았던 기간은 모세가 태어난 시점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나온 나이 80세까지, 대략 80년 내외이지 않을까 싶다.
알고 있는 대로 야곱의 후손들은 이집트를 위기에서 구한 총리 요셉의 친족으로 매우 풍족한 삶을 살았고 그런 환경적 요인이 아무런 걱정 없이 후손을 번성시키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겠다 생각된다.
그런 부족함 없는 삶을 살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이 등장한다.
실제로 이집트는 나일강이 주는 풍요함 때문인지 외지 세력의 도전이 빈번했고 토착 이집트인이 왕권을 잡은 시기보다 외지인이 왕이 되어 다스린 시기가 더 길다.
이전 정권을 전복하고 새롭게 정권을 잡은 왕조에게 이전정권의 비호 속에 번성한 야곱의 후손, 히브리인들은 위협적인 세력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야곱의 후손들에 대한 핍박은 시작되었고, 그들은 국고성 등 새로운 왕조의 국가 기반시설 건설하는데 동원되어 고된 노동을 하는 신분으로 전락했다.
성경이 묘사하는 바로는 그런 고된 노동과 핍박 가운데도 히브리인들은 번성했고, 더욱 힘들게 하기 위해 노동 환경을 더욱 열악하게 하거나, 심지어는 히브리 산파를 불러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라 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한 산파들이 남자아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두고 오히려 히브리여인들이 건강하여 자신들이 도착하지 전에 아이를 출산하여 죽일 수 없었다 거짓말을 한다.
이런저런 방법에도 번성하는 위협세력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결국 히브리인들의 태어난 남자아이들을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는 공식적인 명령을 내리기에 이른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 모세가 태어난다.
모세는 어머니와 가족의 품에서 지내다 점점 울음소리가 커져 결국 갈대상자에 넣어져 나일강에 버려졌고, 이집트의 공주에게 발견된다.
이후 그가 이집트 공주의 아들로 성장하고 광야의 생활기간을 지나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시점의 나이가 80세로 추정하는데, 때문에 모세가 태어나던 시기를 이집트의 새로운 왕조가 히브리인들을 견제하고 억압하기 시작한 시점이고, 이후로 모세가 80세에 부름을 받기까지 억압과 고통이 이어졌다 보는 것이 타당하다.
새로운 왕조의 억압이 시작된 이후에 모세가 태어났다고 감안해도 그 기간은 최대 120년 정도로 볼 수 있다.
야곱의 가족들이 이집트로 이주한 후 탈출할 때 가지의 기간을 대략 430년으로 파악하면, 그들은 실제로 300년간은 평온하게 지냈고, 최소 80년에서 최대 120년 정도의 기간을 억압받는 노예로 살았다고 정리할 수 있다.
궁금한 것은 이 기간 동안 야곱의 후손들은 하나님과 어떤 모양의 관계를 이어갔을까 하는 것이다. 그들은 과연 하나님을 알고, 믿고 따르며 살았을까?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그의 12명의 아들들을 직접 대면하시어 가르치시고 경험케 하신 하나님에 대한 그 모든 것들, 특히 요셉을 통해 완성하신 하나님나라 백성의 원형이 이집트에서의 400여 년간의 삶 속에서 이어져 유지되고 있었을까 하는 부분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아브라함으로부터 요셉에 이르기까지 대를 이어 관계를 맺고 가르치시고 하나님을 신뢰케 하신 그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이런 궁금증으로 출애굽기의 내용을 살펴봤다.
명확하게 그들이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살았다는 기록은 없다.
개인적인 심증으로는 야곱의 아들들의 면면을 알기에 그들로부터 태어난 그들의 자손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따르며 살았을까 싶긴 했다.
그나마 요셉이 홀로 하나님이 함께하는 삶의 스탠더드를 보여줬지만 그것이 그의 자녀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통해 얼마나 이어졌는지도 알 수 없다.
때문에 평온하게 지냈던 300여 년간의 시간에 그들은 하나님을 점차 잊어갔고 결국 고난의 시기를 통해 하나님을 찾는 자리로 인도하신 것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짐작해 봤다.
이런 짐작으로 성경을 살펴봤는데 의외로 성경의 사건들을 통해 보이는 여러 정황들은 전혀 하나님을 모른 채 살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히브리 산파들이 히브리인들의 아들을 죽이라는 파라오의 명령에도 하나님을 두려워해 태어난 남자아이들을 살려두고 오히려 파라오에게 거짓말을 하는 모습에서 이들의 삶에서 하나님을 의식함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출애굽기 1장 17절)
더불어 하나님이 히브리산파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 백성이 번성하고 강하여졌고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한 그 산파들의 집을 흥왕 하게 하셨다는 부분에서 여전히 하나님은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을 돌보셨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 하게 하신지라
(출애굽기 1장 20절 ~ 21절)
또 다른 정황적 증거는 모세가 보여준 동족에 대한 연민을 통해 그들이 민족적으로 동일감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같은 조상으로부터 비롯된 사람들이라는 것이 강한 동질감과 소속감으로 작용한 측면이 있지만 그 조상들의 이름에 항상 함께 등장하는 하나님의 존재역시도 그들의 정체성과 소속감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인일 것이라 생각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스스로를 소개하셨던 것 말이다.
그렇게 기억되길 원하셨던 그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단순히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택한 사람들이란 정체성을 갖길 원하셨다는 것.
이런 동질감에 모세는 부당하게 학대받는 동족을 보고 분을 참지 못해 학대하는 이집트의 관리를 죽였던 것이다.
한 가지 더, 외지에서 유입되어 새롭게 왕조를 만든 세력들이 토착 이집트인들은 제외하고 유독 히브리인들만 억압하는 것에서도 히브리인들은 독립된 정체성으로 결집되어 위협적인 세력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보인다.
해서 히브리인을 공공의 적으로 삼고 토착 이집트인들에게 환심을 사려는 새로운 왕조의 정치적 행보였지 싶다.
여하튼 400년의 세월 동안 토착 이집트인들에 동화되지 않고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구별된 세력으로 보일 수 있는 배경에는 단순히 아브라함의 후손, 즉 동족이라는 인식 만으로는 설명하기에 부족하고 하나님이라는 특별한 요인이 인식의 저변에 작용했다고 밖에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반면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한 채 지냈을 것 같은 정황들도 엿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모세를 부르시고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라 명하시는 하나님께 거부하는 모세의 핑계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출애굽기 3장 12절 ~ 13절)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 앞에 서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고 말하면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을 것인데 그때 무엇이라 대답할지 답을 구한다.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 안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명확지 않았고, 있다 하더라도 보편적이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어쩌면 모세조차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분명치 않을 수도 있었겠다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모세가 하나님에 대해 명확하고 분명한 인식이 있었다면 백성들도 자신과 같을 것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누가 보내었다고 말해야 할지’라는 질문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모세도 히브리 인들도 ’드디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나보다’라며 반길 거라 생각지 않았을까?
설사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부족해 누가 보냈내고 질문을 할 것이라 예상했어도 모세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었다면 그 답을 스스로 알았을 것이기 때문에 ‘누가 보냈다고 말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은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정황은 많이 있다.
출애굽 이후 홍해를 마주하고 뒤편에 쫓아오는 이집트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 원망하는 모습, 광야에서 먹을 물이 없어 여기서 우릴 죽이려 하느냐고 원망하는 모습, 고기를 달라며 차라리 이집트의 종살이가 더 좋았다는 불평,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있을 때 하나님이라 믿고 제사 지낼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을 진노케 하신 행태까지 셀 수 없이 많이 있다.
심지어 이런 모습은 애굽에서의 기적과 같은 재앙들과, 홍해를 가르시는 역사와, 만나를 내리시고, 불기등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는 가운데 보였다는 점은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에 대해 무지했는지를 가늠케 한다.
이런저런 정황들 가운데 ‘모세와 이스라엘민족은 애굽에서의 400년의 살아감 가운데 하나님을 알고 따르며 지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정황적 답은 ‘신실하게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이 혼재되어 있었다.’로 보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이렇게 정리가 되고 보니 더 궁금해진다.
이집트에서의 400년은 과연 어떤 이유와 목적으로 필요했던 것일까?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이길래 600년 전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계획하시고 실행하신 것일까?
이 기간 동안에 그들이 특별해지는 그 어떤 것도 살펴볼 수 없었기에 이집트에서의 삶을 유추해 정리했지만 궁금함은 오히려 더 커졌다.
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일단 시작했으니 마무리는 짓자는 생각으로 가보려 한다.